2019년은 3·1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이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기념행사가 잇따랐다. 당시 서남아시아권 어느 한인교민회로부터 3·1절 기념 강연을 초청받았다. 하늘의 별처럼 많은 독립운동가들 중 누구를 얘기할 것인가. 몇날 고민 끝에 찾아낸 게 최재형 선생이었다. 그때 준비한 강연 PPT 제목이 '순결한 영혼의 뜨거운 조국 사랑-페치카 최'였다.

▶최재형 선생. 오랜동안 그 존재도 드러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다. 함경도 노비 집안의 아들이다. 아홉살 때(1870년대) 가족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령 연해주로 넘어간다.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마지막 선택이었으리라. 그 곳 집에서도 쫓겨난 소년 최재형은 어느 부둣가에서 러시아인 선장을 만난다. 표토르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 이름을 얻은 소년은 상선 선원이 돼 6년간 지구를 두바퀴 도는 항해를 한다. 이후 블라디보스톡에 정착한 선생은 유통_군수사업에 성공, 연해주의 거부로 성장한다. 남의 땅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동포들을 살뜰히 살피고 38곳에 한인학교를 세우기도 한다. 그 곳 동포들과 독립투사들은 그를 '페치카 최'라 불렀다. 뜨거운 난로같은 사람이라는 이름이다. 국내진공을 목표로 한 의병조직 '동의회'를 결성하면서 안중근 의사를 만난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하러 떠나는 안 의사에게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 두 자루를 건넨 이도 선생이었다. 나중에는 거처할 집 한 채도 남지 않을만큼 수만금의 재산을 동포들과 독립운동에 바친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 한인마을로 쳐들어 온다.('4월 참변') 일본군의 총격에 쓰러지던 날 선생이 남긴 말이 있다. “나는 목숨을 바칠 수 있다.”

▶벼슬을 했거나 양반의 지위를 누렸던 여느 독립운동가들과는 결이 달랐다. 태어나 생을 마감하기까지 나라 덕이라고는 받은 게 없는 최하층 출신이다. 그래선지 독립운동가들마다 이름 앞에 붙은 호(號)도 없다. 1944년 일본군에서 탈출한 장준하_김준엽 등이 천신만고 끝에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들 눈에 비친 임시정부는 지리멸렬한 파벌싸움판이었다. 장준하가 일갈한다. “다시 일본군에 돌아가 항공대에 지원, 충칭 임시정부를 폭격하고 싶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최재형 선생을 이렇게 그려놓았다. '객지에 나간 자식이 집 걱정하듯 그의 조국 사랑은 원시적이었다.' '동포들을 도우면서도 결코 장자풍(長者風)을 뽐내는 일도 없는 사람'

▶추미애 전 장관이 '최재형 상'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엔 감사원장 상을 받았나 했다. 시상식에선 1923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 걸렸던 태극기를 펼쳐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최재형 선생의 삶은 장엄했고 죽음조차 의연했다. 순결한 영혼의 독립운동가를 이렇게 오염시켜도 되는 것인가.

/정기환 논설실장 chung783@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