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7월31일 대한민국 정치사의 거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죄목은 '간첩죄'였다. 재심이 기각된 지 17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간첩 누명을 씌워 저지른 '사법살인(司法殺人)'이었다. 제2·3대 대통령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이승만의 라이벌로 부상한 조봉암(曺奉岩)을 말한다.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았던 그다. 조봉암은 어쩌다 간첩으로 내몰렸고, 사형에까지 이르렀을까.

조봉암이 사형을 당한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1956년 3대 대선에서 217만 표로 대중의 지지를 받은 그는 여세를 몰아 그 해 11월 진보당을 창당했다.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인 혁신정치를 꿈꿨다. 국민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진보당과 조봉암이 이룩하고자 했던 일은 결국 이승만 대통령 심기를 건드렸고, 그가 간첩으로 몰린 결정적 증거였다. 조봉암의 득표력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은 마침내 그를 법정에 세워 일사천리로 재판을 진행했다.

반세기 넘게 묻혀 있었던 진보당 사건. 숱한 유족들의 재심 요구에도 열리지 않던 재판부의 판결이 52년 만인 2011년 대법원에서 열렸다. “주문:원심판결과 1심판결 중 유죄부분을 각 파기한다.” 사법부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했다. 결국 정권에 의해 정치적 목적으로 집행된 살인이자, 한국 정치사의 비극으로 고스란히 남은 사건이었다.

죽산(竹山) 조봉암은 인천인이다. 1899년 강화 선원면에서 태어나 강화초교를 나오는 등 어린 시절을 강화에서 보냈다. 이후 그의 생애를 요약하면 이렇다.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3·1 만세운동에 참가해 구속되면서 '민족적 각성'을 다져 나갔다.

일본과 러시아 유학을 거치면서 사회주의자 길로 접어든 죽산은 국내와 중국 상하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중국에서 체포돼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옥살이를 한 뒤 나와 인천에 정착했다. 광복 직전인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헌병대에 다시 구속돼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전향 성명을 내고 '비(非) 공산정부 건립'을 기치로 내걸었다. 1948년 5월 제헌의원으로 당선돼 헌법 기초의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7월엔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취임해 “혁명 없이 신속한 토지 균등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은 농지개혁법을 주도했다.

“오직 똑같은 처지에 있는 소약한 사람끼리 모여서 강한 자의 무리로 더불어 걸을 뿐이다. 이것이 조선인의 진실한 진로요, 오직 하나인 살길(活路)이다.” 죽산이 1924년 11월1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그는 일제 강점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해방의 앞날을 제시했다. 이 글은 '죽산 조봉암 기록(1899~1950)' 책자에 실렸다.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가 최근 발간한 책엔 1899년 출생부터 1950년 인천에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까지 기록이 담겼다. 죽산이 가졌던 꿈과 그가 뿌린 씨앗을 얘기한다. 그가 추구한 평등과 정의의 사회는 무엇일까. 여전히 우리에게 숙제를 던져주는 듯하다.

/이문일 논설위원 ymoon58@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