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집단이든 오랜 세월을 거쳐 공동으로 형성되는 행동규범, 가치관, 지켜야 할 도리와 관습, 인습들이 있다. 그 문화권을 벗어나면 어쩌면 별 쓸모없는 관념들일 수도 있지만 그 집단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려면 지키고 따라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지연, 학연, 근무처, 소속, 직위, 성, 연령, 결혼관계 등 개인이 속한 집단의 직함으로 그 존재를 수식하고 판단하는 사회에서는 두드러진다. 그 집단 속에서 살아가자면 누구나 다면(多面)의 페르소나(Persona)를 가지게 된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말인데, 현대 심리학에서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

칼 융은 '페르소나는 가상(假相)'이라고 단정했다. 페르소나는 남에게 '보이는 나'이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아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산물일 뿐 나의 참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페르소나는 가면이 아니라 나의 숨겨져 있던 자아이며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함으로써 다양한 자아실현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또 다른 자아인 페르소나를 요즘은 '부캐'라고 부른다. '부캐'란 온라인 게임에서 본래의 캐릭터(본캐)가 아닌 또 다른 캐릭터(부캐)를 말하는 합성 신조어인데, 이미 우리는 MBC 예능프로그램에서 활약하는 유재석을 통해 유재석 본캐보다 유고스타, 유산슬, 유르페우스, 닭터유, 유두래곤, 지미 유, 카놀라유 등 여러 개의 부캐로 친숙해졌다.

유재석 뿐 아니라 매드 클라운의 부캐 마미손, 개그우먼 김신영의 김다비, 개그맨 추대엽의 카피추, 트로트가수 임영웅의 부캐 진행자 MC웅, 래퍼 MC웅, 유튜버 MCN, 93세 베테랑 MC 송해의 아리송해 등 부캐의 활약상을 익히 보아 왔다. 부캐가 인기를 끄니 부캐들의 활동을 전문적으로 지원하는 매니지먼트 회사까지 설립되고 있다. 가히 1인10색(一人十色) '부캐전성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연예인들 뿐만이 아니다. 일반 직장인 중에도 대다수가 멀티 페르소나 트렌드에 공감하며 본래의 직업 외에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인 부캐로 활동하는 붐이 일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의 영향으로 여가를 활용하여 여러 개의 직업을 갖는 'N잡러'가 늘고 있고, 이른바 '워라벨(Work-life-balance:일과 삶의 균형)'이 직장인들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자리 잡으며 적극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하다 보니 그것이 실제 수입을 창출하며 제2의 직업이 되기도 하고, 때론 부캐의 수입이 본캐보다 월등히 많아져서 부캐가 본캐가 되는 경우도 많다.

또한 급속도로 발전하는 SNS와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온라인 활동이 주류를 이루다 보니 유튜브 크리에이터, 블로그 작가 등 또 다른 형태의 SNS 상의 '멀티 부캐'가 급속도로 양산되는 추세다.

코로나19로 꽉 막히고 답답한 일상, 서로 만나고 교류하고 함께 모여 어려움을 나누고 싶어 하는 인간적 욕망을 똘똘한 부캐 하나 키워 보는 것으로 해소해 보면 어떨까. 더 늦기 전에 평소 관심이 있거나 좋아하는 것, 또는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 더 이상 억누르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해 보는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넓고 다양한 가능성들이 열려 있는 부캐의 세계로 한 번 뛰어 들어가 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필자 역시 본캐는 스토리텔링작가인데 지금은 주안영상미디어센터장으로 근무하며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부캐가 본캐를 앞서게 된 격이라 할까.

/남두현 주안영상미디어센터장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