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서 중고교 졸업·교사 활동…현재 중앙대 교수
군사독재 폭거 비판·농민에 관심 …·민중작가라 불려
50여년 예술로 사회 가치 실천 …개인전 등 다수 활동
인천의 예술, 역사와 전통 꽃피우려 노력해야
시립박물관, 인천아시안미술관 처럼 방향 설정을
코로나19에 지친 예술가들, 일단 먹여살려야
이종구 작가는
1954년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으로 유학을 왔다. 인천에서 중 고등학교를 마치고 1976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1980년부터 2003년까지 인천 동산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고 2004년부터 현재까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80년대 군사독재시절 민중미술운동에 참여했으며 지난 40여 년 동안 20여 차례의 개인전과 500여회의 기획전, 단체전에 출품했다. 2005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고 가나미술상, 우현예술상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내 주요 공공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으며 인천민족미술인협의회 대표, 민예총 인천지회장, 인천문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뜨끔해진다.

가벼이 잊고 지내던 뭔가를 계획했을때의 굳건했던 각오와 어느새 되풀이 하고 있는 과거의 뼈아픈 실책 같은 것들이 방어할 틈을 주지 않고 떠오른다.

그 누구의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치부하기엔 무책임한 세상의 하중과 환란이 생경하게 전달해 오는 것이다. 극사실주의 화풍으로 우리 시대의 흐름과 민중, 특히 농민의 삶을 고찰한 이종구 작가는 50년 넘게 줄곧 예술을 통한 사회적 실천을 말하고 있다.

중학교 시절부터 인천에서 지낸 그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지닌 예술가로서의 인정을 넘어서서 인천미술의 선험자이자 문화예술계를 올바르게 견인할 선배로서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아티스트들이 어느 때보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이 시대 그에게서 인천 문화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오랫동안 민중작가라는 타이틀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1980년대부터 사회현실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림을 그렸다. 군사독재 시절 권력이 폭압이 되는 과정을 예술을 통해 비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저항을 한 셈이다. 1982년 '임술년'이란 단체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이 단체에서 활동하며 폭거의 현장에 즉각 대응하고 문제제기하고 고발했다. 당시 나는 이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며 보람을 느꼈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1980~90년대 처럼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 정신만은 계승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민중작가들의 모든 행동은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비롯됐다. 휴머니즘을 토대로 인간다운 삶을 위한 예술적 활동을 지향했던 것이다.

그 시대적 삶을 향한 하나의 정신적 활동에 대한 창작 철학은 지금도 그렇고 장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생태계 문제와 같은 환경운동과 전쟁반대, 다국적기업 등에 관심을 갖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는 농민화가라는 수식어도 자주 붙는다. 80년대 산업화 과정을 거친 농촌의 현실과 농부가 일하는 모습을 주로 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표현으로만 나를 대변하는 것은 조금 경계하는 편이다. 활동범위가 고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예를 들면 세월호와 남북의 정상회담 같은 현안들을 깊게 파고들어 그린다.

▲ 이종구 작가는 50년 넘게 줄곧 예술을 통한 사회적 실천을 말하고 있다.  이종구 작가와 작품 사진들.
▲ 이종구 작가는 50년 넘게 줄곧 예술을 통한 사회적 실천을 말하고 있다. 이종구 작가와 작품 사진들.

▲인천의 문화예술이 지닌 색깔은 무엇이라고 볼 수 있나.

딱히 없다. 우선 인천은 서울의 변방이라는 이미지가 아주 강하다. 짧은 시간에 서울로 이동할 수 있는 건 문화예술 생산자나 소비자 둘 다에게 해당된다. 종합적인 문화예술 인프라가 풍성한 서울 의존도가 높다보니 인천만의 시장이 구축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작가는 그림을 그려서 팔고 판매한 것으로 다시 창작을 하는 선순환 구조가 마련돼야 하는데 인천엔 제대로 된 화랑도 없다. 이 자체가 마련되지 않다 보니 인천에서 예술활동을 한다는건 점점 더 열악하다.

서울과 인천은 행정적으로 분리돼 있을 뿐 예술적 분리는 전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서울과 먼 전라도, 강원도, 부산 등의 지역은 확실한 독립을 이뤘다. 자신만의 예술적 색깔을 가지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무색무취라는건 치명적 단점이기도 하지만 좋게 보면 장점이 되기도 한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하얀 캔버스처럼 여러가지 표현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천의 문화예술인들이 우리만의 역사와 전통을 꽃피우고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다만 공적영역에서 해야 할 부분까지 사적 영역에서 추진하는건 어렵다고 본다. 인천의 근현대미술 100년사 편찬이 특정 단체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데 역사를 서술하고 후대에 남기는 일은 공론화를 거쳐야 할 일이다. 자칫 검증과 객관화에서 문제가 될 위험이 있어서다.

▲시립미술관조차 없는 현실이 인천 미술계의 열악함을 증명하는 것 같다. 이제라도 건립될 시립미술관의 건립방향은.

지금이라도 인천시립미술관이 생겨서 다행이다. 이번 미술관을 통해 인천의 문화예술 색깔을 지정하고 이끌어 나가야 하지 않나 싶다. 만약 그저그런 콘텐츠를 설정할 경우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또다시 서울에 흡수되는 현상이 생길 것이다.

우리만이 내세울 수 있는 소재, 디아스포라나 서해평화, 다문화, 항만·공항 등을 고려해 주제를 정할 필요가 있다. '인천아시안 미술관' 처럼 선명한 색깔과 확고한 방향 설정이 있어야 한다.

어디에나 볼 수 있고 아무도 찾지 않는 향토 미술관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일에 적극 동참하려 한다.

또 지금 1개의 시립미술관이 생기지만 이를 기점으로 제2, 제3의 공공미술관을 건립하는 일도 시급하다.

 

▲코로나19가 덮친 문화예술계가 너무나도 참혹하다. 출구가 있겠는가.

미술관과 공연장이 문을 닫았다. 연주자나 예술가들이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 들인 노력이 거품이 되어 날아다닌다. 생산은 됐는데 소비를 못 시키는 암흑 속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허우적 대고 있다.

온라인 공연과 전시가 하나의 방안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건 하나의 기술적 방법이지 이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현재 예술인들의 모든 활동의 맥이 끊길 위기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끊어진 맥을 이으면 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번 절단난 것은 결코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술의 고사는 우리사회의 큰 손실을 가져올테다. 한명의 예술가가 창작활동을 하는 과정은 공공의 자산이지 개인의 취미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저지하는 방법은 딱 하나다. 국가와 지자체, 지원기관들이 공공자금으로 예술가를 지원하는 것이다.

지금 미미하지만 예술인 지원이 있기는 하다. 이걸 넘어서고 사각지대를 찾고 틈새를 메우는 발굴과 행정의 대 변화가 요구된다.

온라인 서비스와 같은 중계 기술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생산자인 예술가를 일단 먹여 살려야 한다. 예술가들은 자체적으로 돈을 벌 수 없는 구조다. 공공재로써 이들을 인식하고 문화를 제공하는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실핏줄 같은 지원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대재앙이 올 것이 분명하다. 예술가들 역시 소통하고 서로 예술세계를 확장하며 시민들에게 서비스할 궁리를 해야 한다.

/글·사진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