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과연 어느 나라가 바나나 리퍼블릭이냐.” 케냐의 한 신문 기사제목이다. 바나나 리퍼블릭이란 원래 경제가 낙후되고 민주주의가 미성숙한 나라를 비꼬면서 가르키는 용어이다. 한마디로 바나나나 팔아서 겨우 살고 정치가 부패한 나라를 일컫는 것이다. 미국에서 이러한 용어는 아프리카 등지의 후진 민주주의 국가를 의미한다. 이번에는 그간 멸시를 당했던 나라가 이제 바나나 리퍼블릭은 미국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왜 그럴까.

2021년 1월6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대통령선거 결과를 승복하지 않는다고 연설했다. 그날은 의회에서 2020년 대통령선거 결과를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절차를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연설을 듣던 군중은 미 의사당 건물로 향했고 총기까지 휴대한 군중들은 미 의사당 건물을 점거해서 선거결과 승인절차를 중단시켰다.

정치학에서 대의 민주주의를 측정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가 첫째, 공정하고 주기적인 선거가 치러지고, 둘째, 복수 정당의 자유로운 경쟁이 이루어지며, 셋째, 후보나 정당이 선거결과를 승복하느냐이다. 대의 민주주의의 절차라는 측면이 일단 게임의 규칙으로 받아들어져야 내용이나 질이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논할 수 있는 법이다. 적어도 이 지표에 따르면 2020년 대통령선거와 관련해서 미국은 민주주의가 붕괴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2016년 1월 1%의 지지율로 출발하여 온갖 기행을 저지른 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트럼프는 힐러리 민주당 후보와 역대 최악의 대통령 TV토론회를 가졌다. 4년의 임기 동안 미국 사회는 양분되었고 재선을 위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대통령이 코로나19에 직접 걸리는 일까지 생겼다. 2020년 대통령 TV토론회에서는 다시 트럼프 대통령이 상대의 말을 끊거나 시간을 넘겨가면서 발언을 하자 규칙까지 바뀌었다. 발언 시간을 넘기거나 발언 순서를 어기면 마이크를 끄기로 고쳤던 것이다.

2020년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에는 자신에게 불리한 선거결과를 뒤집기 위하여 끊임없이 시도했다. 대표적인 스윙스테이트 가운데 하나인 펜실베이니아의 선거결과를 뒤집기 위해서는 주 단위에서 소송을 이어갔고 연방대법원에도 소송을 걸었다. 조지아에서는 혹시나 선거결과가 뒤집힐까 하는 생각에 두 번이나 재검표를 시켰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공화당 소속의 주 의회 의원, 국무장관, 고위 선거관리 등에게 선거결과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기를 종용하거나 압력을 행사했다. 특히 조지아의 주 국무장관은 공화당 소속인데도 자신과 가족을 살해하겠다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위협까지 받았다고 한다. 첫 한국계 미 연방검사장 박병진은 트럼프 미 대통령이 주장하는 조지아주의 부정선거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새해 벽두에 경질되기도 했다.

이러한 패턴은 반복적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선거운동 당시에 생긴 러시아 스캔들로 인하여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수사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트럼프 미 대통령은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장에게 러시아 스캔들 수사를 중단하게 종용하고 압력을 행사했다. 급기야 트럼프 미 대통령은 2019년에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하원에서 탄핵소추를 당했다. 하지만 공화당이 다수였던 상원에서 간신히 탄핵에서 방면되었다.

1월20일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이라 자신의 임기가 며칠 안 남은 트럼프는 두 번째 탄핵의 위기에 처했다. 이번에는 내란선동이라는 혐의가 탄핵의 주된 내용이 된다. 현직 대통령이 국민들로 하여금 의사당을 점거하고 선거결과를 불복하게 했으니 인과응보이다. 그러나 두 번째 탄핵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탄핵을 소추하는 하원의원 435명 가운데 민주당이 222명을 확보하여 소추 정족수인 과반수 조건을 충족했지만 탄핵을 가결하는 상원의원 100명 가운데 3분의2인 67명이라는 조건을 맞추려면 현재 50명인 민주당 의원에 더하여 17명의 공화당 의원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SNS에서는 새로운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1월17일 한 번 더 연방의회와 50개 주의회 의사당을 공격하자는 계획이 확산되는 중이다. 도대체 미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만큼 더 추락하는지 관심을 모은다. 이러한 바나나 리퍼블릭이라면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 법질서, 자유와 책임 등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을 하고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까. 어쨌든 영국의 유수한 언론사인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 평가에서는 최근 한국이 미국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은 것이 놀라운 게 아니라 당연하게 이해된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