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선적 인간 중심주의에 경종을 울리다
▲ <담헌서> 내집 권4, 보유, <의산문답> 서두 부분 (홍영선 편;홍명희 교, 신조선사,1939-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제 <의산문답>에서 중요한 질문과 답변을 발맘발맘 따라가 보자. 유학에서 그렇게 추구하는 인간상인 현인(賢人)으로부터 시작한다.

 

유학에서 현자란?

허자: 주공(周公)·공자의 업을 숭상하고 정자·주자의 말씀을 익혀서 정학(正學)을 붙들고 사설(邪說)을 배척하며 인(仁)으로 세상을 구제하고 명철함으로 몸을 보전하는 게 유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현자(賢者)입니다.

실옹: 네가 도술에 미혹됨이 있음을 진실로 알겠다. 아아! 슬프다. 도술이 없어진 지 오래다. 공자가 죽은 후에 제자들이 어지럽혔고, 주자 문하의 유학자가 혼란시켰다. 그의 업적은 높이면서 그의 진리는 잊고 그의 말을 익히면서 그의 본의는 잃어버렸다. 정학을 붙드는 것은 실상 자랑하려는 마음(긍심)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사설을 물리치는 것도 실상 이기려는 마음(승심)에서 말미암았으며, 인으로 세상을 구제하는 것은 실상 권력을 유지하려는 마음(권심)에서 말미암았고 명철함으로 몸을 보전하는 것은 실상 이익을 노려보자는 마음(이심)에서 말미암았다. 이 네 가지 마음이 서로 따르매, 참뜻은 날로 없어지고 온 천하는 물 흐르듯이 날로 허망으로 치닫도다. 지금 너는 겸손함을 꾸며서 거짓 공손으로 스스로를 현인이라 하며, 얼굴만 보고 음성만 듣고서 남을 현인이라 하는구나. 마음이 헛되면 몸가짐이 헛되고 몸가짐이 헛되면 모든 일이 헛되게 된다. 자신에게 헛되면 남에게도 헛되고 남에게 헛되면 온 천하가 모두 헛되게 된다. 도술에 빠지면 반드시 천하를 어지럽히나니, 네가 그것을 아느냐?

<의산문답>의 서두 부분이다. 실옹은 시작부터 파격적으로 “도술이 없어진 지 오래”(道術之亡久矣)라고 단언한다. 도술은 바로 유교다. 허자는 유교를 “정학을 붙들고 사설을 배척하며 인으로 세상을 구제하고 명철함으로 몸을 보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옹은 표방은 그럴듯하나 실상은 잘난 척하는 긍심(矜心), 이기려는 승심(勝心), 권력을 유지하려는 권심(權心), 자기 몸만 보신하려는 이심(利心)이 있기에 모두 허위라고 한다. 실옹의 말은 끝내 “도술의 미혹은 반드시 천하를 어지럽힌다”(道術之惑 必亂天下)는 데까지 나아갔다.

선생이 바라보는 당시 유학자들의 학문은 조선을 어지럽히는 혹술(惑術)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혹술이 된 학문으로 나라를 경영하려 하였으니, 그야말로 한밤중에 검둥개 찾는 격이다. 선생은 허학에 빠져 실학을 잃어버린 당시 속유(俗儒)들을 서두부터 이렇게 통매한다.

다음은 유교에서 목적인 대도에 관한 물음이다.

 

대도(大道) 요체란?

허자: 천지간 생물 중에 오직 사람이 귀합니다. 저 금수나 초목은 지혜도 깨달음도 없으며, 예법도 의리도 없습니다. 사람이 금수보다 귀하고 초목이 금수보다 천한 것입니다.

실옹: 너는 정녕 사람이로구나! 오륜과 오사(五事, <서경> '홍범'에서 말한 다섯 가지로 얼굴은 단정하게, 말은 바르게, 보는 것은 밝게, 듣는 것은 자세하게, 생각은 투철하게.)는 사람의 예의요, 무리 지어 다니고 소리쳐 울고 젖을 먹이고 하는 것은 금수의 예의요, 떨기가 모여 덩굴이 되고 오리오리로 뻗어 자라는 것은 초목의 예의다. 사람으로서 물(物:사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나, 물로서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하늘로부터 사람을 보면 사람과 물이 마찬가지다. 대체로 군신 간의 의리는 벌에게서, 군대의 진법은 개미에게서, 예절 제도는 다람쥐에게서, 그물 치는 법은 거미에게서 각각 취해온 것이다. 까닭에 “성인은 만물을 스승으로 삼는다”하였다. 그런데 너는 어찌해서 하늘의 입장에서 물을 보지 않고 오히려 사람 입장에서 물을 보느냐?

허자의 말은 장자의 도가적 견해와 조금도 다를 게 없다. 바로 <장자> '제물론'(齊物論)이다. '제물론'은 만물은 일체이며, 그 무차별 평등 상태를 천균(天均)이라 한다. 천균은 자연 상태에서 유지되는 균형 감각, 즉 조화로운 마음이다. 옳다 그르다가 아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이런 천균 상태가 되면 모든 시비는 사라지고 마음은 지극한 조화를 얻게 된다. 장자는 이를 양행(兩行)이라고도 하였다. 천균, 양행 모두 대립되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바라보고 두 입장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양쪽을 모두 수용하니 그야말로 전체적 사고이다. 장자는 이렇게 보면 삶과 죽음도 하나이며 꿈과 현실의 구별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이 나 자신도 잊어버리는 망아(忘我)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수양의 극치라고 하였다.

선생이 유학자로서 장자의 제물론에 동조하는지는 단언키 어렵다. 다만 당대 '천지만물 가운데 오직 인간이 가장 귀하다'(天地之間 萬物之中 唯人最貴)는 독선적인 인간 중심 관념을 타파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선생의 견해는 '하늘로부터 본다'(自天而視之)는 천도본위(天道本位)다. 즉 하늘에서 보면 사람이나 금수나 다를 바 없다는 '인물균사상'(人物均思想)이다.

인물균사상은 1678년, 김창협이 유배지에 있는 송시열에게 <중용장구> '수장'(首章)에 의문을 제기한 '상우재중용의의문목'(上尤齋中庸疑義問目)에서 촉발되었다. 이후 인물성동이 논쟁은 조선 후기의 최대 논쟁이 되었다. 대체로 낙하(洛下, 서울)에 사는 학자들은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지지하였고 호중(湖中, 충청도) 학자들은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이를 '호락논쟁'이라 하는데, 부연 설명을 하여야겠기에 다음 회로 넘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