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넉넉해지고 싶은

한 해가 저무는 시점이다. 늘 그렇지만 시작과 마침은 경우에 따라 시기가 다를지언정 정해져 있는 듯하다. 인생살이의 다양함에 누가 토를 달까마는, 커다란 틀에서 바라보면 기승전결(起承轉結)은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이치가 아닐까 한다. 사람의 인생은 막 태어난 영아기로부터 유년기, 청소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구분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작과 끝의 기한은 다르게 규정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유한한 무대에서의 기승전결은 결국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아무리 인간 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예순살의 나는 아마도 노년기에 속할 것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조심스러워진다. 2020 끝자락에서.

영화를 많이 보며 지낸 올 해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어차피 여행도 어렵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혹은 당하거나의 경우를 차단하려면 외출은 자제함이 옳다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은 방안에서 덩치 큰 아들과 하루 온종일 화면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쉽지는 않은 터. 극장으로 영화관람을 하는 방안을 냈다. '원더우먼 1984!'

내가 미국에 도착한 해가 1983년이고 영화의 배경은 1984년도인데 그 시대의 옷차림, 도심의 모습이 왜 그리 생경했을까. 아마도 매일 보는 상황에 자연스럽게 변화가 스며들어 익숙해진 탓이었을게다. 영화는 신나는 볼거리가 많았고, 헐리우드 영화의 절묘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화려하게 접목된 장면은 커다란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까닭에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주제는 결국 한가지로 모아지는데, 사람이 가지는 소원을 어떻게 현실에서 펼치는 가에 따라 평화로운 세상이 되거나 아님 파멸로 가는 것.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소원에서 머물면 남이 불행하고 아파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 종내엔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하기 위한 세상을 원하는 것이 자기에게도 행복으로 다가온다는 진리였다. 주인공 원더우먼 다이애나가 자신이 잃어버린 사랑했던 남자를 다시 찾은 것에 대한 애착을 버렸을 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힘을 회복했고, 성공을 찾아 헤매는 무자비한 맥스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며 자신이 차지한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건강한 힘의 원천을 보상으로 구하다가 역설적으로 아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인간성을 회복한다. 각자의 소원을 비는 것에 생각없이 무심결에 내뱉은 대로 이뤄지는 어이없는 결과에 오히려 엉망이 되어버리고, 더 나아가 극한 욕심을 갈구함으로써 본연의 따뜻함을 잃게 된 인간의 슬픈 장면도 있다.

절대 선(善) 혹은 절대 악(惡)이 있을까?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인간은 원래 죄인으로 출발하고 절대자의 구원으로만 비로소 선함을 입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내재하는 선과 악의 공존을 어찌 설명할까. 선한 얼굴이 악마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은, 그 마음에 어떤 생각이 자리하는 가에 따라서 밖으로 표출되는 것임을 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외친 사도바울의 절규는 항상 내 곁에 도사리고 있어서, 스스로 절제하려 애쓰지 않으면 금방 속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이 드러날 수 있음 역시 안다. 이제는 나이도 조금 들었거니와 주변을 먼저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러한 돌출 정도나 빈도를 다스리고 있는 내 한계이다. 결국 조금씩이나마 나아지는 모습을 갖추기 위한 나의 애씀이 위선과는 구분이 되어지기를 바라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편안한 사람으로 다가갈 수 있는 넉넉함이 내 안에 차곡차곡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해를 정리하는 시점에 말이다.

/Stacey Kim 시민기자 staceykim6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