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여(53)씨가 이제야 누명을 벗었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진범으로 몰린 지 32년 만이다. 2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1988년 8차 사건이 발생한 지 32년, 대법원에서 윤씨의 무기징역이 확정된 지 30년 만이다. 그의 일생과 가정은 풍비박산 났다.

수원지법 형사12부(박정제 부장판사)는 지난 17일 열린 윤씨의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경찰 자백진술은 불법체포·감금 상태에서 가혹행위로 얻어진 것이어서 임의성이 없고 적법절차에 따라 작성되지 않아 증거능력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피고인의 자백과 법정 진술은 다른 증거들과 모순·저촉되고 객관적 합리성이 없어 신빙성이 없는 반면, 이춘재의 자백 진술은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들과도 부합하여 그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특히 “20년이라는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을 피고인에게, 법원이 인권의 마지막 보루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에 대하여 사법부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또 “오늘 선고되는 이 사건 재심판결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피고인의 명예 회복에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피고인은 무죄”라는 주문이 낭독되자 윤씨의 작년 경찰의 재수사부터 재심 청구, 재판 전 과정을 도운 박준영 변호사, 법무법인 다산의 김칠준, 이주희 변호사, 그리고 방청객이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윤씨의 무죄 선고는 이미 예견됐다. 8차 사건을 포함해 30년 넘게 미제로 남아 있던 화성, 수원, 청주 일대의 살인사건 14건을 이춘재(57)가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했고, 경찰의 재수사 과정에서도 이춘재가 진범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춘재는 지난달 2일 윤씨의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8차 사건 등 화성·청주에서 발생한 총 14건은 내가 진범”이라고 증언했다. 이춘재는 8차 사건 범행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증언했다. 또 법정에서 방청하던 윤씨에게 “사죄하겠다”며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검찰도 지난달 19일 결심 공판에서 윤씨에게 무죄를 구형하고 사과했다. 검찰은 당시 “피고인이 이춘재 8차 사건의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히 확인됐다”며 “수사의 최종 책임자로서 20년이라는 오랜 시간 수감 생활을 하게 한 점에 대해 피고인과 가족에게 머리 숙여 사죄한다”고 말했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16일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가정집에서 박모(당시 13세·중학생) 양이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된 사건이다. 인근의 농기계수리점에서 일하던 윤씨는 이듬해 7월 범인으로 검거됐다. 윤씨의 나이는 당시 21세였다. 그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소하면서 “경찰의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며 혐의를 부인했으나, 2심과 3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20년을 복역 후 2009년 모범수로 가석방된 윤씨는 이춘재의 범행 자백 이후인 지난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은 지난 1월 이를 받아들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윤씨는 “100억원을, 1000억원을 준다 한들 내 인생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기자님한테 '20억 줄 테니 감옥에서 20년 살아라'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보상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게 싫습니다”라며 억울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의 앞에서 공권력을 남용한 이들은 변명으로 일관했다. 재심 공판에 출석한 경찰관들과 감정인들, 그리고 검사와 검찰 실무관 등은 하나같이 오래된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책임을 떠넘기는 식의 변명을 늘어놨다. 당시 누가, 왜 어떤 경위로 그와 같은 조작과 가혹 행위를 지시한 것인지, 지시자와 행위자 등 위법행위의 경위에 대해 명백하게 진술하지 않았다. 결국 그에게 누명을 씌운 책임소재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 역시 예견됐다. 그를 도운 박준영 변호사가 그동안 무죄를 입증한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등에서도 책임소재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처럼 국가 공권력의 잘못된 수사와 판결로 많은 사람이 억울한 옥살이와 죄인으로 낙인찍혀 살아왔다. 이번을 계기로 공권력을 남용한 국가범죄 등에 대해선 공소시효를 배제하고 당사자를 처벌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더는 머뭇거려서는 안된다. 국민 공감대 역시 어느 때보다 높다.

“앞으로 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앞으로는 공정한 재판만 이뤄지는 게 바람이다.” 윤씨가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는 이유다.

/정재석 경기본사 사회부장 fugoo@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