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무쇠 가마솥 솥뚜껑이 열리자 하얀 김이 훅-하고 밥 짓는 어머니들 얼굴에 와락 달라붙었다. 이어 큰 밥주걱을 휘둘러 아랫밥과 윗밥을 골고루 섞어주고 나서 물에 치댄 손으로 한 움큼의 주먹밥을 만들었다. 오늘 따라 북촌 바다의 세찬 북서풍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하얀 김의 옆구리를 후-욱하고 잔인하게 끊어 놓을 찰나 어느새 어머니들은 고운 하얀 한지에 흰 쌀밥을 싸넣고 이어 준비된 붉은 색과 노란 색의 이중 겹침의 천으로 만든 동백꽃보자기로 예쁘게 포장을 하였다.

겨울이 되면 제주 섬에서는 동백꽃의 붉은 아름다움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동백꽃의 꽃말은 '그대를 사랑 합니다'라고 하는데 제주에서는 더욱 선명하면서도 서늘하게 그 느낌이 다가온다. 바로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3사건의 상징성 때문이다. 제주4·3사건은 7년7개월 동안 제주도민 약 3만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그 중에서는 노약자·어린이·여성 5000명 정도가 희생되었는데 특히 10살 이하의 어린 희생자들은 자신의 이름도 얻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한 가슴 아픈 사연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이름도 얻지 못한 그들은 부모의 이름에 '누구의 자'로 명명되었는데 '임경욱의 자1(3세, 여)' 혹은 '임경욱의 자2(1세, 남)'식으로 제주4·3평화공원 각명비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비슷한 이름들을 대거 발견(문용하 1세, 남/ 문운하 5세, 남)하게 되는데 그들은 형제지간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나쁜 죽음을 맞이한 4·3희생자들은 종종 동백꽃으로 표현되는데 동백꽃은 꽃잎으로 떨어지는 대신 꽃송이 전체가 떨어져 차디찬 땅에 붉게 물들어 마치 4·3희생자들의 죽음처럼 처절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최근 10살 이하 어린 영혼을 위한 추모의 영화 '폭낭의 아이들'을 제작하면서 동백꽃보자기를 통해 영화장면인 미장센을 구성하였다. 보자기는 우리의 오랜 전통문화로서 '소중한 물건을 싸서 들고 다니기 위해 네모지게 만든 천'이라는 뜻으로 “복을 싸서 선물한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영화는 제주4·3사건 최대 피해지역인 북촌리 너븐숭이 애기무덤에서 촬영되었는데 북촌리4·3희생자유족회 어머니들이 흰 쌀밥을 가마솥에 짓고 붉고 노란 동백꽃보자기에 밥을 싸서 어린 영혼들을 위해 43개를 지어 올리는 장면이다.

부모님과 가족의 따듯한 품을 떠난 어린 영혼들은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듯한 흰 쌀밥을 배불리 먹고 잠시나마 외로움과 고단함, 그리고 서러움을 잊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연출한 장면이다. 그리고 북촌리 유족회원들을 비롯한 제주4·3사건 유족회원들의 가슴 사무친 고통과 시린 마음이 잠시나마 따듯해졌으면 한다. 육지 사람이 와서 이렇게 잊혀져가고 불려질 이름도 없는 아이들에게 따듯한 흰 쌀밥을 지어 올린다는 것에 촬영장은 유족회 어머니와 더불어 관심 있는 일반 참여자들뿐만 아니라 감독인 나에게도 벅찬 감동의 현장이었으나 더불어 가슴 한쪽은 무척이나 아펐다. 언제나 북촌리와 제주 섬에는 평화의 바람이 불어올까? 촬영하는 그날 북촌 너븐숭이 애기무덤에는 차디찬 북서풍의 겨울바람이 무척이나 매웠다.

산 자들은 죽은 자의 이름을 통해 그를 기억하고 사랑했던 날들에 대한 기억을 추억한다. 제주4·3평화공원을 가게 된다면 희생자의 이름을 기록해 둔 각명비 174개가 있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그들의 이름을 천천히 불러보자.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 그 너머에는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평화'를 부르는 것이다.

/사유진 영화감독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