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들이 계절에 따라 기분이 바뀌고 겨울만 되면 한층 우울감이 깊어지는 경우를 종종 주위에서 목도한다. 노먼 로젠설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계절적인 변화에 순응하도록 최적화되어 있는데 현대의 인공적인 빛에 대한 과다한 노출과 속박들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겨울은 낮의 길이가 짧아져 사람의 활동성을 위축시켜 생물학적 휴업을 허용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활동을 강요하여 우울증을 유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요즘은 계절적인 요인과 더불어 코로나 시대를 맞아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에서 얘기하는 바와 같이 그 우울감은 우리 내적 감정의 기저에 깔려있는 에너지마저 밑빠진 독처럼 고갈시켜 버리고 다시 우리 의식의 지평으로부터 샘솟아 나오는 새로운 에너지로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그 내면의 더 깊은 어둠속 감정의 나락에 스스로를 가두게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링컨은 “나는 우울한 사람이다”, “내 우울은 불행한 운명탓이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은 아니고 그 탈출구로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를 슬기롭게 활용하여 결국 빈농의 아들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하였다. 2차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처칠은 우울증을 검은 개로 비유하며 우울증이 나타날 때마다 유화를 그리며 검은 개가 사라지길 바랐다고 한다. 반면, 그는 일상의 유머와 해학에도 매우 뛰어났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유사 이래 모든 역사적 창작활동에도 일종의 정서적 우울감이 수반된다고 알려져 있다. 혼자만의 우울의 시간의 수평선에서 결국 어떠한 형태의 육체적 또는 정서적인 창조 활동이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몽테뉴도 말년에는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죽기 전 20년간 글쓰기와 독서에만 매진하였다고 한다. 그와 같은 시공간적 고립감에서 봉건주의에 저항하는 심오하고 창조적인 사고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큰 울림의 파장이 탄생한 것이라 본다.

우리는 현재 예기치도 않게 개인, 지역, 국가간 접촉과 교류가 극도로 제한된 우울의 고립된 상태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 우리의 원시적인 사회문화적 유전자에는 자연스럽게 공동체적인 유대와 결속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이 영원성의 한 부분에 속해 있다는 인간 본연의 존재적 영속적인 공감을 통해 현실에서의 큰 위안을 받는다고 한다. 또한, 터부와 금기 그리고 토템 등의 원시종교의 자산에서 알 수 있듯이 신적인 존재와의 영원한 연결성을 추구하여 왔다.

이 가운데 공감주술, 동종 주술 등과 같은 원시 신앙의 토대가 싹텄었고 주술사를 중심으로 그 결속력과 유대감을 강화하기 위해 인신공양과도 같은 원시 문화도 갖고 있었다. 얼마전 코로나의 확산에 대한 대중의 우려와 염려를 크게 샀던 할로윈도 인신공양을 대체하는 주술적인 원시종교의 곡물신과 풍요에 대한 기원과 악령의 추방의 염원에서 유래한 문화적 유산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원초적인 문화형태를 통해서도 우리는 누군가와 연대하려했고 공통적이며 정서적 유대감을 서로가 확인하여 일상적인 생활의 안정과 평안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그와 같은 원시적이며 내재적인 공동체적 유대감과 연결성을 SNS와 같은 비대면 형태로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

이와 같이 극도로 제한된 고립생태계에서 하이퍼 루프, 상업용 우주선, 자율 주행차 등 4차 산업과 관련된 기술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또 다른 현실이다. 우리가 코로나 이전에 일상적으로 영유해왔던 개인적인 취미활동, 여가생활 등 소위 워라벨에 걸맞는 시간의 효율적인 활용은 크게 제한되어 일상적인 우울감이 일반 저변에 폭증되어 가는 상황이다.

우울감은 일면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기본적 감정의 일부라서 누구나 그리고 항시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다. 지금의 코로나 시대에는 그 저변과 강도의 크기가 더욱 확대 증폭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시간을 코로나 이후 우리에게 다가올 미지의 또 한번의 세기적 의식 체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신세계를 준비하면서 개인과 공동체의 창조적 활동과 유대를 강화해나가는 미래 지향적 축척의 희망과 기회의 시간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창균 인하대 환경공학과 교수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