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요지 거점 삼아 왜적 물리치고자 했으나…

1896년 1월17일 백현서 일본군에 큰 승리
같은 달 27일 의거 촉구하는 국왕 밀조 받자
의병 늘고 인근 의진 합세로 2000 군세 이뤄

3월13일 양곡·군수품 풍부 남한산성 점령
해산령에도 진공작전 참여 의진 점점 늘어

관군·일본군, 의병 합세 땐 한성 위태 판단
대장 박준영 등 벼슬로 회유…4월3일 함락

병력 수습 여의치 않자 연고지 영남행 합의
기반 확보에 이점 기대…대장으로 추대돼
▲ 남한산성 동문.
▲ 남한산성 동문.
▲ 김하락의 이천의병전적비(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남정리).
▲ 김하락의 이천의병전적비(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남정리).

◆ 남한산성 점령하다

1896년 1월17일(음력 12월3일), 다수의 일본군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알아낸 김하락의 이천의진에서는 백현(魄峴:광현廣峴 또는 넓고개)에서 복병계(伏兵計)를 써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백현은 오늘날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남정리 산 4-4번지에서 광주시 실촌읍 신촌리 산 43-7번지로 연결되는 고개이다. 이천의진은 이 전투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거둬 다시 이천으로 돌아온 후 훈련을 하면서 이현(梨峴)·원적산(元寂山) 및 여주·양지 경계 등지를 엄중히 지켰다. 1월26일에는 격문을 각지에 보내어 의병에 동참하여 국난을 극복하자고 호소한 가운데 이튿날 진중에 국왕의 밀조(密詔)가 날아들었다.

“왜적이 궁궐을 침범하여 사직의 안위가 아침저녁으로 급박하게 되었으니 힘써 소탕 토벌하라. 경들의 자손에게는 후한 녹(祿)이 있으리라. 김병시(金炳始)로 삼남창의도지휘사(三南倡義都指揮使)를 삼고, 계궁량(桂宮亮)으로 목인관(木印官)으로 삼아서 목인을 포사(布賜)하려 한다. 경기도를 순의군(殉義軍), 충청도를 충의군(忠義軍), 영남을 장의군(仗義軍)으로 한다.

조서를 8도 각 고을에 내려 보내니, 8도 각 고을에서는 모두 동성상응(同聲相應)하여 의거(義擧)하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김하락진중일기>, <독립운동사자료집> 1. 588쪽)

김하락은 조서를 안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국가가 달걀을 포개 놓은 것 같은 위기에 직면하고, 임금이 바늘방석 위에 앉은 것 같은 상황을 빚어낸 것은 모두 신민된 자의 허물이다. 아! 우리 제군은 동심협력하여 국가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도록 하자.”

라고, 하니 이에 여러 장졸들이 눈물을 뿌리며 죽기로 맹세하였다.

이천의진이 국왕의 밀조를 받았다는 소식은 인근 지역으로 퍼져 나가 의병에 참여하는 자가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심상희(沈相禧)가 여주의병을 거느리고 왔고, 이어 안성에 격문을 보내어 민승천(閔承天)이 안성의병을 거느리고 왔다. 3월7일(음력 1월24일) 의병 수효를 헤아려 보니, 포군(산포수)이 1800명이고, 장수·종사관을 합하여 2000여명에 달하였으니, 진중의 형세가 크게 떨쳤다. 이에 의병장들은 의진을 연합하여 재편성하였다.

 

대장 : 박준영

여주대장 : 심상희

군사 겸 지휘 : 김하락

도소모 : 전귀석

선봉장 : 김태원

중군장 : 구연영

좌익장 : 김귀성

우익장 : 김경성

후군장 : 신용희

 

연합의진의 특징을 보면, 종전의 창의대장 민승천 대신에 박준영이 그 후임을 맡았고, 심상희를 여주대장으로 한 것은 여주의병이 많았기 때문에 완전히 합군을 하지 않고, 따로 지휘권을 행사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새로 부서를 정하고 며칠간 정돈과 훈련을 한 다음, 드디어 3월13일(음력 1월30일)에는 광주의 남한산성을 점령하였다. 원래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이래 국방상 중지(重地)로 인조 이후 성을 수축하고 군사를 배치해 왔으며, 많은 양곡과 무기 등을 저장하여 외침에 대비해 오던 곳이었다.

김하락은 <정토일록>(일명 <김하락진중일기>)에서 입성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산성은 사면으로 산이 깎아 서고 성첩이 견고하니, 정말 한 군사가 관문을 막으면 1만 군사도 열 수 없는 곳이다. 성중을 둘러보니 양곡이 산같이 쌓이고 식염이 수백 석이며, 군물(軍物)이 풍부하게 갖추어 있다. 대완구(大碗口)·불랑기(佛狼機) 포가 수십 문, 천(天)·황(黃)·지(地) 자의 포가 역시 수십 문, 천보총(千步銃)이 수백 자루이며, 그 밖의 조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화약·철환이 산같이 쌓였다. 여러 장수들이 군용물이 많음을 한껏 즐거워하고, 또 진을 칠 곳이 견고함에 기뻐하였다.”

남한산성이 경기 연합의진의 수중에 들어가자 한성의 친위대와 강화도 주둔 진위대가 출동하여 남한산성을 사면으로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성중의 의병이 2000여명인데 비해 관군은 700여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던 의병에게 유리하였으니, 관군은 감히 성에 접근조차 못하고 먼 곳에서 총을 쏘고 있는 형편이었다.

 

◆ 의병해산령 내리다

경기도 연합의진 수뇌부는 국왕의 거의 밀조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병해산령'이 내렸다. 의진에서는 일제의 조종을 받는 내각에서 꾸며낸 것이라고 판단하여 여주대장 심상희 등은 의병을 해산할 수 없는 이유를 상소한 후 성을 굳게 지키면서 서울(한성) 진공을 위한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전 사과 심상희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칙교(勅敎)를 읽건대, 경군과 의병은 각각 자기 처소로 돌아가라고 하였으니 폐하의 말씀이 대단합니다. 은혜롭게 생각해주는 것이 하늘과 같으므로 신은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즉시 흩어져 돌아가지 않는 것은 왜놈들이 나라 안에 가득 차고 역신들이 말을 못하게 하면서 도덕이 있는 당당한 나라를 재물과 권세로 여기기 때문에 신들의 이 거사는 다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주(周) 나라에서는 흉노를 친 후에야 선왕(宣王)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한(漢) 나라에서는 역적 왕망(王莽)을 처단한 후에야 광무제(光武帝)가 다시 번창하였으니 적을 토죄하고 역적을 주륙하는 데에 신들이 이 일을 담당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896. 2. 29.)

의병해산령이 내렸지만 의진에는 날로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안성 방면의 의병 수백 명이 남한산성으로 향하고, 춘천 지역 3000여명의 의병도 양근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행하고자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의진에서는 이들 의병과 연합하여 한성으로 들어가서 왜적을 물리치고, 일제 앞잡이들을 처단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고, 왜적이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되는 부푼 꿈에 젖어 있었다.

 

◆ 남한산성 내주고 영남으로 향하다

관군과 일본군 측에서는 남한산성을 군사로써 함락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곧 타지의 의병들이 합세하면 한성조차 위험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대책을 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19일. 나(김하락)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하여 산을 내려가 조리하고 있었다.

21일에 이르니, 산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기가 가슴에 차서 발을 구르며 호통하다가 부지중 땅에 쓰러졌다.

대개 적병이 피해 달아난 뒤로 역당(逆黨)과 더불어 모의하기를, '의병의 진영이 심히 강하여 쉽게 사로잡을 수 없은즉, 의병장과 암통하여 이해로써 꼬이는 것이 상책이다.' 하고, 마침내 비밀리 박준영에게 기별하기를, '만약 귀화한다면 너에게는 당연히 광주유수(廣州留守)를 줄 것이고, 김귀성에게는 수원유수를 주겠으며, 불복한다면 전국의 병력을 몰고 가서 토벌하겠다.' 하니, 박·김 두 놈이 자기 이익에 급급하여 적과 더불어 상통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날 서울에 들어가 정탐한다는 그 걸음은, 실상 아무 날 아무 시각에 문을 열어 놓겠다는 약속이었으며, 김적(金賊)의 도피는 박적(朴賊)이 들어서 몰래 놓아 보낸 것이었다. 그들의 역적행위는, 20일에 박적이 소를 치고 술을 걸러 크게 포졸들을 먹였다. 이날 밤에 각문의 파수 장병이 모두 취해 넘어져 인사불성이 되니, 박적은 군인들의 취기가 무르익기만을 노렸었다. 21일은 새벽 3시 경에 서·북문을 활짝 열어 놓았는데도 한 진영의 장졸들은 전혀 몰랐었다. 5시가 다 되자 고함 소리가 크게 일어나므로, 취해 넘어졌던 군졸들이 놀라 일어나 보니 온 성중이 모두 적병이었다. 2천여 장졸은 비로소 박적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즉시로 박준영 3부자(三父子)를 끌어내어 한꺼번에 총살하고 급히 성 밖으로 나가니, 적병들이 도리어 호송해 주며, '빨리 달아나라. 일본 놈을 만나면 죽는다.' 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593~594쪽)

의병이 점령하고 있던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이라 관군 측에서는 비밀리 김귀성을 꾀어 대장 박준영을 유혹하였다. 그들이 귀순하기만 하면 박준영은 광주유수로, 김귀성은 수원유수로 임명하여 함께 복록을 누리자는 것이었다.

이미 1895년 6월18일(음력 5월26일) 칙령 제97호, '감영, 안무영과 유수 폐지에 관한 안건'에 의해 실제로 '광주유수', '수원유수'라는 직책은 없어졌지만 두 사람은 그 꾐에 넘어가 의병들에게 회식을 시킨 후 성문 수비를 담당하던 의병들에게 더욱 술을 잔뜩 먹이고는 성문 수비를 소홀히 하는 사이 관군이 들이닥쳤다.

1896년 4월3일(음력 2월21일) 새벽, 2000여 의병들은 밤늦도록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 곤히 잠들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관군으로 인하여 혼비백산, 정신없이 허둥대다가 일시에 뿔뿔이 흩어졌으니, 남한산성을 점령한 지 20여 일만에 허무하게 내주고 말았다.

관군에게 남한산성을 빼앗긴 후 김하락·구연영·김태원·신용희 등은 흩어진 의병들을 수습했지만 이미 의병해산령이 내린 상황이라서 큰 성과가 없자 영남지방으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에 의견일치를 보고, 김하락을 의진의 대장으로 추대하여 영남으로 향했다. 이는 영남이 김하락의 연고지여서 의병활동의 기반을 확보하고 전투력을 확충하는 데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남 각지는 당시 의병활동이 가장 왕성한 곳이었던 까닭에 이들과 호응하면서 효과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