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호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일 년 가까이 장모님이 예후가 좋지 않은 병으로 투병을 하고 계신다. 의사라 해도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조금 덜 힘 드시게 노력할 뿐이다. 힘 없이 창 밖을 내다 보시는 장모님을 보면서 저 분이 안 계셨으면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수 있었을까 싶어 감사한 마음에 가슴이 아린다. 우리 아이들에게 외할머니는 소중한 존재이다.

인간 만큼 아이의 양육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동물은 없다. 송아지는 태어나자 마자 뛰어다니며 풀을 뜯지만, 인간은 18세가 될 때까지 의식주도 해결할 수 없다. 우리의 양육 기간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수백만 년 전 홍적세의 선행 인류가 지능과 사회적 기술을 생존 전략으로 택했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보다 5배 큰 뇌를 발육 시키고 복잡한 사회적 기술을 습득시키려면 오랫동안 키우는 방법 밖에 없다. 오늘날 산업국가에서의 양육 기간은 30년이 족히 넘는다. 우리나라의 평균 초산 나이는 32세이다.

인류의 또 다른 수수께끼는 폐경 현상이다. 모든 동물들은 죽는 날까지 생식을 유지하는데 인간 여성만 생애의 중간에 폐경을 하고 그 후로 30년을 더 산다는 것은 과학적 연구과제였다. 그 실마리를 푼 것은 인류 발원지인 동아프리카에서 원시 부족 하드자족을 연구한 유타 대학 연구팀이다. 기후 변화로 삶이 척박해지고 먹을 거리가 줄자 하드자 엄마들의 양육과 새 임신은 위기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살리고자 나서는 것은 40~60세의 딸의 어머니들이었다. 지구의 모든 토착 종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류 역사의 어느 때부터 인간 여성은 딸이 아이를 낳으면 더 이상 자기 아이를 갖지 않고 자원과 에너지를 손자들에게 돌리는 것을 택하였다. 할머니의 존재는 아이들의 생존이 보장되고 엄마들이 새로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힘이 되어 왔다. 이것을 인류학자들은 '할머니 가설'이라 한다. 할머니 양육이 사회 진화를 주도하고 인류의 수명을 연장시켰으며 우리 종의 성공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손자 손녀들의 생존을 지켜주느라 고된 삶을 살아 낸 할머니들의 자손이다.

그런데 100세 수명 시대에 진입하면서 인류 생활사는 큰 변혁을 겪고 있다. 중•장년기가 전례 없이 길어지고 잠깐의 노년기를 스쳐 질병기로 금방 진입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런던경영대학의 린다 그래튼은 수명이 너무 길어져 '교육-일-퇴직'의 전통 사이클이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긴 삶에서 직업을 한번 이상 바꾸어야 하고 재교육 동안 서로 돕기 위해 맞벌이가 결혼의 표준이 될 것이라 예측한다. 게다가 현대의 직업들은 여성에게 적합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은 시대의 흐름을 넘어 진화 현상이다. 우리는 더 이상 홍적세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 신혼 부부의 55.6%는 친정과 10㎞ 이내에 첫 살림을 꾸린다. 육아는 결국 엄마가 떠맡을 확률이 높고 믿을 건 자신의 엄마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2019년 조사에 따르면 방과 후 혼자 지내는 아동이 21.7%에 달한다. 대도시, 저소득, 맞벌이 가구에서 아이들이 혼자 있는 시간이 길다. 코로나로 아이들의 재택 교육이 길어지면서 많은 젊은 맞벌이 부부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우리 세대까지는 할머니들의 희생으로 버텨 왔지만 더 기대할 수 없다. 요즘 아이들을 돌봐주는 할머니들은 비혈연 할머니들이다.

지난달 무소속 이용호 의원은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에게 돌봄 수당을 지급하는 '아이돌봄 지원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할머니 양육의 의미를 잘 짚은 제안이다. 그러나 이제는 남성이나 국가가 양육에 무임승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앞으로 할머니들은 사라진다.

남성들은 확실하게 양육을 공동 분담해야 하고 정부는 비혈연 양육, 국가 보육기관 같은 다차원적 지원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태고 적부터 아이들의 생존을 지켜주며 힘든 삶을 산 인류의 할머니들이 감사하고 그립다. 그분들의 노년에 행복이 있기를 기원한다. 이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