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다시 음미하는 1543년의 조선과 일본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적 통일국가를 형성했다. 고루한 막부체제를 혁파한 주체는 대부분 사무라이계급에서도 하급무사들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사카모토 료마,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찌, 사이고 다카모리 등 수많은 하급무사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한 결과였다. 그들은 세계의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파악했고 일본의 변화야말로 당시 약육강식의 국가경쟁에서 생존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누적된 모순을 감추고 있던 막부체제로는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그들은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의 전환이라는 과업을 실행한 것이다.

메이지유신이 천황주의와 함께 일본을 군국주의로 나아가게 해서 결국은 아시아를 전쟁의 수렁 속으로 빠트린 치명적 과오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이 국제적 감각을 기르고 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한 과정은 현재의 우리가 한번쯤 숙독할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특히 그 당시 조선의 상황과 대비하면 더욱 그렇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삼전도의 굴욕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인조는 지금의 송파구인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한 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보낸다. 청태조 누르하치의 열네 번째 아들이며 나중에 섭정왕이 되는 다이곤은 북경을 점령할 때 소현세자를 데리고 간다.

소현세자는 욱일승천하는 청나라의 세력과 명나라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명왕조의 멸망을 현장에서 목격하였다. 경천동지하는 세상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기회는 흔치 않은 법이다. 더구나 소현세자는 서양의 신부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문명과 사상, 과학기술을 접했다. 그런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와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어쩌면 조선의 역사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고한 인조와 지배세력들은 7년 동안 인질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소현세자와 강빈, 손자 석철까지 죽음으로 내몰았다.

서원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번성하여 과거에 낙방하고 병역을 기피하는 유림들의 도피처로 전락했다. 노비, 전답 축적 등의 폐해가 커지고 토호들과 사림당쟁의 결속처 역할로 전락했다.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는 사원만 전국에 40개가 넘었다고 하니 그 폐해가 오죽했을까.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완고한 사대주의와 보수사관에 갇힌 폐해는 고스란히 우리 자신에게 돌아왔다.

 

우금치에서 풀잎처럼 스러져간

죽음들을 돌이켜보라

1895년 12월 공주 우금치에는 1만여명의 동학군, 2000여명의 관군 및 200여명의 일본군부대가 대치했다. 관군과 일본군은 1분에 탄환 200발을 발사하는 게틀링 기관총과 독일제 75밀리 크룹포, 그리고 무라다 소총으로 무장했고 농민이 주축인 동학군은 대부분 죽창을 들고 있었다. 밀집대형으로 늘어선 채 집중 돌격해오는 흰 무명옷 위로 비처럼 총알이 쏟아졌다.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의 주문으로 총알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저며진다. 그렇게 우금치는 숱한 주검으로 뒤덮혔다. 조선의 멸망도 그렇게 구체화되었다. 그 풀잎처럼 스러져간 죽음에 대해 책임져야 할 이는 누구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무기와 병균, 금속이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갈파했다.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인류의 역사를 재해석한 그의 저서에서 유독 나의 주목을 끈 것은 총,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본의 총'이었다. 1543년 타네가시마에 우연히 남겨진 총 두 자루가 던진 작은 파문은 500년 가까운 시공간을 넘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타네가시마에는 1960년대 후반에 건립된 일본우주센터가 있다. 내 고향인 고흥의 나로도 우주센터와 같은 곳이다. 2012년에는 우리나라 아리랑위성 3호를 쏘아 올리기도 했는데 매년 2-3회씩 지금까지 130여회 이상 로켓이 발사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보릿고개를 넘고 있을 때 일본은 우주센터를 세웠던 거다. 우주의 꿈이 여무는 그곳에서 우리의 불행한 근현대사의 서막도 열리기 시작했다.

지난 역사는, 그래서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시와 비슷하게 전개되는 역사 앞에서 우리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지난 전철을 되풀이할 것인지, 용기있게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