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모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프랑스에서 <샤를리 에브도>라는 잡지가 무함마드를 저급하게 풍자한 것을 이유로 2015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가 발생해 12명이 살해된 이후 유럽에서 종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최근에는 다시 위 풍자만화를 교재로 삼은 역사교사를 참수하는 사건이 발발하고 이에 대한 서방의 비판이 이어지더니, 서남아시아의 이슬람교도가 반프랑스 군중시위를 벌이는 등 유럽과 중동을 넘어선 증오의 확산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물질, 권력, 명예, 사상, 예술, 나아가 사랑과 신(神)까지도 그것이 인간이 인식하는 대상인 한에 있어서는 이를 절대화 하는 것은 위험하다. 신의 이름으로 벌이는 종교전쟁도 끔찍한 살육일 뿐이며, 사랑의 이름으로 가하는 폭력도 용서받지 못할 가해행위일 뿐이다. 하늘 아래 유무형의 어떤 것도 절대적인 가치로 미화해서는 아니 된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통된 뿌리인 구약성경에서 가르치는 십계명은 제일 계명으로 신을 흠숭할 것을 가르친다. 그런 차원에서 다른 신앙의 지존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결코 잘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십계명 어디에도 나아가 모든 경전을 통틀어 신을 모독했다고 참수하거나 보복하라고 쓰인 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경전은 친구와 원수를 구별하지 않고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천벌을 내리는 것은 하늘이 하실 일이지 인간이 나설 일이 아니다. 신앙의 문제가 이럴 지인데 다른 인간사는 더더욱 상대적일 뿐이다.

남들 얘기만이 아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도 자신의 생각, 자기 집단을 절대적 선으로 여기고 이와 다른 이들을 단죄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풍조가 있지 않나 걱정된다. 인간이기에 그의 생각과 행동에는 과오가 있기 마련이며, 인간의 역사이기에 부족하기 마련이다. 절대적 잣대를 들이대면 살아남을 위인과 오류가 아닌 역사가 없다. 영욕과 선악이 얽힌 역사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면서도 위대한 업적과 선행을 본받고 오욕과 악행을 반성하는 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가 가져야 하는 태도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애창곡이었던 <타는 목마름으로>를 들을 때면 께름칙한 부분이 있다. “치 떨리는 노여움에” 부분이다. 치 떨리는 노여움에 민주주의를 쓰고, 치 떨리는 노여움에 민주주의여 만세를 부르고. 그 노여움을 품은 사람이 드디어 정권을 잡아 위정자가 된 세상은 생기가 약동하고 평화가 넘치는 세상일까?

무릇 위정자가 되기 위해서는 노여움을 삭히고 풀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치 떨리게 노여워하던 상대방을 닮게 된다. 만델라가 존경스러운 이유가 이 부분에 있다. 많은 위정자들이 민중의 노여움을 부채질하고 이용함에 반해 자신의 노여움을 삭히고 민중의 노여움을 달랜 것이다. 노여움을 풀어야 사실을 객관적으로 본다. 노여움을 뺏을 때 과거 신군부는 피 보기를 좋아했던 악귀가 아니다. 현 정권은 처음 경험해보는 재앙의 화신이 아니다. 과욕과 판단착오가 불러온 참극일 뿐이다.

인간지성은 수천 년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으며, 그것보다 더 오랫동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단죄했다. 그런데 21세기에 우리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아닌가? 그나마 참을 발견하는 바른 방법은 과학과 이성이지 신념과 감성이 아니며 과학과 이성마저도 온전한 진리를 파악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준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의 다수결은 과학과 이성이 정의를 밝히지 못하는 영역에서 부득이하게 결정을 내려야하는 때에 사용하는 차선책일 뿐이다. 그 결과가 정의로움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기의 신념과 감성적 판단이 절대선이며 나머지 것들은 수단이나 장애물 나아가 악으로 취급하는 것은 우리가 터무니없게 여기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번 대선을 겪으면서 민주국가의 모범이라는 명성에 스스로 먹칠을 하고 있다. 우리도 내년에는 보선, 이듬해에는 대선이 있다. '서로 다름에도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선거가 축제가 되지만 절대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파국으로 치닫는 도화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