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완공돼 1894년 불타 사라져
1988년 복원했지만 제자리서 빗겨가
화수화평 재개발 구역 속해 '풍전등화'
▲ 화도진 터로 추정되는 화도진공원 아래 주택가. 이 일대는 대규모 재개발 구역에 포함돼 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근대문화유산 대상 시기를 등록문화재 기준인 1876년 이후, 즉 개화기부터로 삼는다면 인천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은 '화도진'이어야 한다.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화도진은 1879년 완공됐다. 인천시 지정기념물 제2호인 화도진 안내판에는 “갑오개혁(1894)으로 군제가 개편됨에 따라 화도진은 불타 없어지고, 그 후 주택이 밀집돼 있던 곳을… 1988년에 화도진도를 기본으로 복원”했다고 적혀 있다.

화도진이 없어졌다가 복원되기까지에 대해선 구체적 설명이 없다. 역사의 공백은 복원의 오류를 낳았다. 원래 화도진은 언덕 꼭대기인 현재 공원이 아니라 언덕 중간쯤부터 아래쪽 주택가까지 걸쳐 있었다.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화도진도와 일제강점기 발행 지도를 통해 지형과 길을 분석해보면 화도진지는 송현동 방향 경사지였다”고 말했다. '인천시사(1993)' 역시 같은 곳을 언급하며 “화도진사는 동구 화수동 128번지·163번지와 그 주변 일대에 위치”했다고 기록했다.

복원의 오류는 화도진에 또다시 시련을 드리우고 있다. 공원 옆 원래 화도진 터는 '화수화평 재개발 구역'에 속해 있다. 주택들이 들어섰지만 그나마 공원으로 이어진 화도진 터가 지형도 알아볼 수 없는 '아파트 숲'으로 개발될 처지에 놓인 셈이다.

화수화평 재개발 구역은 서쪽으로 화도진공원부터 동쪽 방향 송현초등학교까지, 남쪽으로는 화평동 냉면거리 위부터 북쪽 화수사거리 인근까지 걸쳐 있다. 시의 '도시정비사업 추진 현황(8월 말 기준)' 자료를 보면, 조합 설립 단계인 화수화평 구역 면적은 축구장 26개 크기인 18만998㎡에 이른다. 드넓은 재개발 부지에는 화도진 터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공설 목욕탕, 조선기계제작소·일본차량(인천공작창) 공장 사택 등도 포함돼 있다.

화도진 병사들이 식수로 사용했다는 화수동 쌍우물, 1970년대 동일방직 민주노조운동을 비롯해 민주화의 역사를 간직한 옛 인천도시산업선교회(현 일꾼교회·사회복지선교회)도 재개발 구역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이순민·이창욱 기자 smlee@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