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지은 삼화제분 공장
6·25 땐 피난민 수용소 역할도
유사 시기 중공업 단지로 변신한
화수사거리 일대 일부 건물 현존
도쿄시바우라 공장 본관 '위태'

'인천 근대문화유산' 210개 목록에서 동구 만석동·화수동의 비중은 크지 않다. 일제강점기 공장과 사택 등 산업유산 흔적이 밀집된 지역이지만 존재감은 적다. 만석동 7개, 화수동 1개가 포함된 정도인데, 그나마 철거되지 않은 채 연원이 밝혀지고 원형을 간직한 건축물은 동일방직 의무실과 옛 풍국제분 정도에 그친다.

빌라가 들어선 다카스키 양조장 터에서 주택가 골목길로 1분여를 걸으면 5층 높이의 벽돌 건물이 나타난다. 1930년대 후반 건립 당시 외관을 그대로 간직한 삼화제분 공장이다. 풍국제분으로 시작해 원래 기능을 유지한, 보기 드문 근대산업유산으로 꼽힌다. 인천시립박물관의 '인천 북부 종합학술조사(2004)' 보고서는 “1938년 일본인이 설계한 삼화제분은 일본강점기 동구 최대의 건물이었다. 6·25 때는 피난민 수용소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삼화제분에서 화도진로로 나오면 맞은편으로 시 지정기념물 제2호인 화도진이 보인다. 화도진 입구는 일제강점기 김태훈 정미소 자리로 추정된다. 김태훈(1898~?)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오른 인물이다. 화도진에 공장을 세운 친일파의 모습이 상상되지만, 화도진 원래 위치는 지금의 공원이 아니었다. 화도진공원에서 만난 문화관광해설사는 “화도진은 공원 비탈 아래 주택가에 있었다. 과거 모습을 복원하면서 현재 자리에 지은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들이 다녔던 옛 대한성냥공장이 1968년 문을 닫으면서 생긴 화수자유시장을 등지고 골목길로 들어서면 타일로 마감한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이 나온다. '화도교회 선교관'이란 팻말과 '선화탕'이라고 새겨진 굴뚝을 품은 이 건물은 1932년 인천부(지금의 인천시)가 지은 공설 목욕탕이었다. 목욕탕은 일본인 사업가 노구치가 기부한 돈으로 세워졌다.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당시 인천에서 한국 사람이 갈 수 있는 목욕탕은 한 개에 불과했다”며 “부립 목욕탕이 생기면서 서민들의 위생 상태가 개선됐다. 당시 조선인의 삶을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이라고 했다.

목욕탕에서 화수부두 방향으로 500여m를 걸으면 닿는 화수사거리 일대는 1930년대 후반 조성된 중공업 단지였다.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와 도쿄시바우라(현 일진전기), 일본차량(현 동부·미륭아파트) 공장이 연이어 들어섰다. '인천시 지도포털'에서 1947년 항공사진을 보면, 인중로 남쪽 두산산업차량 공장 일부는 옛 모습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조선기계제작소 사택도 있지만, 강제동원 현장이던 근로보국대 합숙소는 2016년 철거됐다. 토지 소유주는 동구였다.

인중로 건너편 도쿄시바우라(도시바) 공장은 해방 이후 이천전기에서 일진전기로 바뀌었다. 비어버린 공장에는 다른 업체가 입주해 있는데, 2층짜리 본관동은 과거 모습 그대로 남았다. 1938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은 지난해 국토교통부 '공업지역 활성화 시범사업 지구'로 선정된 혁신센터 건립 예정 부지에서 살짝 비껴갔지만, 근대문화유산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채 위태로운 신세에 놓여 있다.

지난 5일 오후 5시30분쯤 산업유산 자취를 좇아 2㎞ 정도 거리 '노동자의 길'을 걷고 다시 동일방직으로 돌아왔다. 담벼락 맞은편으로는 붉은색 컨테이너가 놓여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한 도쿄시바우라 사택이 있던 곳이다.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는 “남아 있는 산업유산이 지역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에 대한 전수조사와 건물의 의미를 밝히는 아카이브 구축이 시급하다”며 “공장과 사택들을 살아 있는 도시 공간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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