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前回)까지 개항이라는 사건에 억지춘향 격으로 끌려 들어간 인천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예고도 없었고, 실체도 모른 채 들이닥친 개항으로 제물포 포구와 나라가 함께 당한 치욕, 손실, 불리 등을 몇 차례에 걸쳐 대강이나마 짚어 본 셈이다.

이번 회부터는 풍상의 제물포 포구를 앞장서서 걸어갔던 사람들―인천객주회(仁川客主會) 사람들을 시작으로 여러 방면에서 앞서 간 인물들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인천객주회 상상도. 1885년 서상집, 박명규 등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인천객주회의 상상도이다. 상인들과 화물이 놓인 번잡한 객주회사무소 풍경을 상상한 것이다. 1995년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발간 당시 제작된 그림이다. (사진출처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인천객주회 상상도. 1885년 서상집, 박명규 등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인천객주회의 상상도이다. 상인들과 화물이 놓인 번잡한 객주회사무소 풍경을 상상한 것이다. 1995년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발간 당시 제작된 그림이다. /사진출처=『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객주에 대해 긴 설명을 할 수는 없으나, 교통의 요지 또는 물산의 집산지에 위치하면서 상품의 매매알선을 주 업무로는 하는 일종의 거간이라고 요약해 말할 수 있다. 대부 등 금융업(金融業)과 숙박업, 음식점업도 맡아했다.

개항 이후 정부는 유포유주(有浦有主), 곧 각 개항장마다 객주들을 두는 정책을 폈다. 물론 인천항에도 객주를 두고 단체 결성을 유도했는데, 낱낱의 객주들을 관리하여 효율적으로 영업세를 거두면서, 또 한편 우세한 자본력을 무기로 개항장에 몰려드는 외국 상인들로부터 민족 상권을 보호하려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물론 개항 당년에 개별 객주와 여각(旅閣)들이 주동이 된 상회사류(商會社流)의 상업 조직들이 인천항에 등장하기는 했으나, 이름과 달리 원시적인 데다가 자본이나 조직, 상술 등에서도 전혀 선진 외상(外商)들에게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인천객주회는 개항 2년 후인 1885년에 결성되었다. 특히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는 인천객주회가 객주 자신들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자발적으로 이룬 단체였던 까닭에 상당히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 인천객주회 상상도. 1885년 서상집, 박명규 등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인천객주회의 상상도이다. 상인들과 화물이 놓인 번잡한 객주회사무소 풍경을 상상한 것이다. 1995년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발간 당시 제작된 그림이다. (사진출처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1907년 3월 5일부터 7일까지 황성신문에 게재된 신문 구독료 독촉광고. 인천항 감리를 지낸 하상기, 서상집, 유찬, 서병규 외에 주사, 경무관, 군수 등이 길게는 몇 년, 짧게는 몇 개월씩 신문 구독료를 내지 않아 당시 인천부에서 광고를 내면서 그 돈을 받아 황성신문에 전하겠다는 내용이다. 서상집도 감리 재직 2개월간인 광무 6년(1902) 7월부터 8월까지 구독료를 미납하고 있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그 중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객주가 서상집(徐相潗), 박명규(朴明珪) 같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인천객주회와 후일 인천신상협회를 주동적으로 만들어 외세에 대항했던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서상집은 조선 상인들의 금융적 지원을 위해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 설립에도 적극적이었던 공로가 있다.

그러나 서상집의 경우 이러한 태도 이면에 상당히 사욕을 챙기는 이중적 행태도 서슴지 않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서상집의 출신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그가 인천 상계(商界)에 이름을 올린 것은 1883년 설립된 상회사 순신창상회(順信昌商會)의 직원으로서였다. 순신창은 영업부진으로 1885년에 미국계 타운센드상회에 인수되는데, 이때부터 서상집은 수년간 그곳의 영업 대리인 격으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방금 삼가 인천 감리 박제순(朴齊純)의 첩보를 보니, 「미국 상인을 관찰하는 서상집은 상선이 항구에 도착하는 경우 매번 미국 상인이 고용하는 배라고 하면서 거짓으로 미국 상선의 깃발을 달게 합니다.」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변화무쌍하여 송안(訟案)을 초래하고 서기관 8원(員)이 단자를 올리고 나가버리는 일까지 있게 되어 공무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해당 상인을 조사하니 서상집이 서양 상인을 사주하여 인천항 관리들의 입을 막아 놓았습니다. 사체(事體)를 망각하고 공무를 무시하면서 사적인 일만 했으니, 이처럼 간사한 상인은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속히 조율(照律)하여 엄격히 처벌하여 항구의 폐단을 제거하고 해관 관원들이 편안하게 일을 할 수 있게 하라는 뜻으로 신칙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1888년 6월 18일조 고종 실록(高宗實錄)에 실린 기사이다. 서상집의 사기성 행패가 해관 서기관들의 반발을 일으켜 공무 집행이 정지될 정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미국 상인은 바로 타운센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 인천객주회 상상도. 1885년 서상집, 박명규 등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인천객주회의 상상도이다. 상인들과 화물이 놓인 번잡한 객주회사무소 풍경을 상상한 것이다. 1995년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발간 당시 제작된 그림이다. (사진출처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1909년 1월 9일자 황성신문 기사로 서상집이 무슨 이유인지 궁내부(宮內府)로부터 가옥과 집물을 압류하라고 인천항 감리에게 훈령을 내렸다는 기사이다. 서상집은 수차 금전 문제로 잡음을 일으켰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이렇게 임금에게까지 처벌을 고할 정도의 비리의 인물이 어느 결에 전환국(典圜局) 기사를 지내다가, 급기야 1902년에는 비록 7월 5일부터 8월 17일까지의 초 단명이기는 했어도, 일약 인천감리(仁川監理) 겸 인천부윤(仁川府尹)에 서임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던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李容翊)이 전환국 국장으로 있을 당시 서상집이 그 밑에 기사로 있었던 인연이 작용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저돌성과 기민함이 그를 인천의 최고 위치에 오르게 했지만, 바로 그 저돌성과 사기성 행태가 초 단명 감리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사건의 선후(先後)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성연 선생의 『개항과 양관 역정』에 서상집이 이용익으로부터 돈 재촉을 받고 타운센드상회로 도피해 며칠씩 숨어 있었다는 구절이 있음을 볼 때, 서상집은 어둡고 사익적(私益的)이며 비리적인 측면을 가진 인물로도 보인다. 그밖에도 서상집은 송사(訟事)와 체포, 재산압류, 불법모금 같은 복잡한 일에 자주 연루된다. 또 도처에 있는 토지를 일인에게 매도하여 거주민들로 하여금 불시에 삶의 터전을 잃게도 한다.

그러나 박명규는 그와는 대조적이다. 『속음청사(續陰晴史至)』 권 12의 기록에 “仁港人 朴明珪” 즉 ‘인천항 사람 박명규’라는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인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1889년 정부 지정 25객주에 포함되어 있던 인천항의 유력한 객주였다.

특히 박명규는 1890년 1월에 설립된 균평사(均平社)의 자본금을 대기도 하고 후에 인천항 신상협회의 부사장, 인명학교(仁明學校) 부교장을 역임하기도 하는 진취적인 객주였다. 그러나 자본의 영세로 타운센드상회에서 외상으로 양목 300필을 구입했다가 제때 갚지 못해 큰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1903년 11월 현재, 인천항에는 약80명의 객주가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태범 박사는 대표적인 객주로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다음의 인물들을 꼽고 있다.

심능덕(沈能德)․정영화(鄭永和)․구창조(具昌祖)․박도행(朴道行)․박창수(朴昌洙)․최응삼(崔應三)․김용태(金鏞泰)․고영근(高永根)․우원연(禹元淵․김병규(金秉圭)․이중천(李仲天)․최홍기(崔弘基)

1. 인천객주회 상상도. 1885년 서상집, 박명규 등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인천객주회의 상상도이다. 상인들과 화물이 놓인 번잡한 객주회사무소 풍경을 상상한 것이다. 1995년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발간 당시 제작된 그림이다. (사진출처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객주 심능덕.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1888년 인천에 이주하여 곡물무역상 및 객주업을 경영하여 인천항 10대 부자에 이름을 올렸다. 1912년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 상의원(常議員)이 되기도 한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1. 인천객주회 상상도. 1885년 서상집, 박명규 등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인천객주회의 상상도이다. 상인들과 화물이 놓인 번잡한 객주회사무소 풍경을 상상한 것이다. 1995년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발간 당시 제작된 그림이다. (사진출처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객주 구창조. 부산 사람으로 13세에 인천으로 이주했다. 그 후 일본의 상업계 견습을 위해 3년간 도일 후 귀국, 1903년에 내동에 정미소를 차린 뒤 1906년 3월에는 객주업 및 미곡상으로 활동했다. 1916년 4월 27일자 매일신보는 “누거만(累巨萬)의 자산을 유(有)한 실업가”로 쓰고 있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1. 인천객주회 상상도. 1885년 서상집, 박명규 등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인천객주회의 상상도이다. 상인들과 화물이 놓인 번잡한 객주회사무소 풍경을 상상한 것이다. 1995년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발간 당시 제작된 그림이다. (사진출처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객주 최응삼.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1897년에 인천으로 이주하여 객주업에 종사했다. 후일 조직된 객주단합소 소장, 신용조합 이사, 인천상업회의소 평의원(評議員)을 지냈다.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이들이 상인이었으니 이윤 추구에 전력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까닭에 간혹 세상에 오명을 남긴 인사도 있으나, 이들의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객주회 활동이 없었다면, 그나마 모든 상거래가 진즉 일인, 청인, 서양인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김윤식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