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인천은 개항(1883년) 후 '연극도시'로도 유명했다. 이미 1910년대에 신파극 등의 공연이 활발했고, 서울의 극단도 인천에 와서 다양한 공연을 벌였다. 당시엔 연극 중심지가 인천이었던 셈이다. 인천에선 1895년 실내극장 협률사(協律舍)가 지금의 경동에 문을 열었다. 서울 첫 실내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1902년 개관했으니, 이보다 7년 빠르다. 국내 최초의 극장으로 평가를 받는다. 1921년 기록을 보면, 인천의 협률사는 외화를 상영하고 연극도 공연하면서, 이름을 애관(愛館)이라고 했다. 1933년 출간한 <인천부사>엔 1900년을 즈음해 100석 규모의 극장이 송학동으로 옮겨 '인천좌'를 설립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극장들이 성업을 이룬 이유는 무엇일까. 개항 이후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몰려든 이들의 향수(鄕愁)를 자극하고, 또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등이 어울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인천의 극장들은 혁신단·인천좌·취성좌·신극좌 등 연극단체에 무대를 제공했다. 여기선 주로 신파극과 전통 악극 등을 올렸다. 1911년 혁신단에서 공연한 '육혈포 강도'는 대표적 신파극이었다. 이 공연은 당시 일제 강점기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1920년대엔 연극을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도 활발했다.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가 주도해 나중에 '한용단'이란 민족주의 청년단체로 발전시켰다. 인천과 서울을 오가던 이들이 신문물을 받아들이며, 아무래도 '고등교육'을 받아 일찌감치 깨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인천 연극은 1930년대 들어 기울어졌다.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더 심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말 '소극장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시 날개를 폈다. 서울에 '문화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침체에 빠졌다가, 재도약을 시도했다. 돌체소극장·경동예술극장·신포아트홀·미추홀소극장 등이 부흥을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1990년 전국 최초의 시립예술극단을 만드는 성과를 낳았다. 이런 전통 덕분일까. 인천은 유난히 훌륭한 배우를 많이 배출했다. 도금봉·황정순·장동휘·김무생·최불암·태현실·정진·전무송·유동근·성동일….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인천 출신이다.

인천영상위원회가 지난 6일 '최불암, 아버지의 얼굴' 기획전을 열었다. 한국영화사 100년을 맞아 '인천의 영화인들'을 기록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11일까지 국민배우 최불암의 대표작 다섯 편을 온라인으로 무료 상영한다. '파계'(1974), '영자의 전성시대'(1975), '달려라 만석아'(1980), '최후의 증인'(1980), '사람의 아들'(1981) 등이다. 최불암은 '전원일기'와 '수사반장' 등 TV 드라마를 통해 대중에게 친숙하고 편안한 이미지로 각인됐다. 기획전에선 그가 어떻게 30대 젊은 나이부터 '아버지' 역할을 연기하며 우리 시대의 '멘토'로 자리잡았는지를 조명한다. 인천영상위가 앞으로도 인천 출신의 영화인들을 발굴·조명하는 작업을 지속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