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25일 타계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두 차례나 그룹 계열의 언론사 임원을 지냈다. 1968년에는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80년 다시 중앙일보 이사직을 맡았다. 선대 이병철 회장은 우여곡절 끝에 낙점한 후계자의 경영 수업을 언론사에서 시작하도록 한 셈이다. 한 기업의 재무제표를 읽는 것에 앞서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두루 세상을 읽으라는 뜻이었을까. 이건희 회장과 고교 시절 절친인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도 그 신문사 정치부 기자이던 시절이다. 그래선지는 몰라도, 이건희 회장이 그룹회장이 된 뒤 한동안은 기자 출신들이 그 신문사 사장에 올랐다.

1993년 초여름, 그 신문사 간부 기자들이 한꺼번에 도쿄 오쿠라호텔로 불려갔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 했던 '삼성 신경영 선언(독일 프랑크푸르트)' 후속 회의였다. 그러나 기자들은 아직 신경영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돌아와서는 촌사람 서울 구경 다녀온 듯 당시 세계 초일류 호텔의 위용만을 안주거리로 삼곤 했다.

▶한국 사회에서 재벌가 2세 경영자들에 대한 평가는 대개 박하다. 그룹을 물려받기 이전부터 한두가지 구설수에 휘말렸기 일쑤여서다. 그러나 고 이건희 회장만큼은 그들 반열과는 멀어 보인다. 오히려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등 창업회장들 반열에 가까다는 느낌이다. 이번에 고 이 회장에 대해 '사업가를 떠나 개척자였다'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창업보다 어렵다는 수성(守城)을 뛰어 넘어, 전 세계 시장에 초일류 대한민국을 진입시킨 개척자였다. 그 원동력은 미래에 대한 비전 또는 혜안이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이건희 회장의 신사업계획서로부터 시작됐다. 삼성전자와 금성전자(LG전자)가 흑백 TV 시장을 놓고 다투던 1970년대다. 결국 선대 이병철 회장의 결단이었지만 “TV도 제대로 못 만든는데…” 등의 걱정이 더 그럴 듯하게 들리던 시절이다.

▶반세기 넘게 대한민국을 살찌웠던 빅맨들의 시대가 가는 느낌이다. 지난해 말 타계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 경영'도 30여년 전에는 곧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가. '변변한 철공소도 없는 주제에' 소리를 들었던 포항제철도, 사통팔달의 고속도로도, 그 빅맨들이 일궈냈다. 500원짜리 지폐의 거북선 그림으로 세계 1위 조선 대국을 일으킨 이도 20년 전에 떠났다. 돌아보니 가히 영웅시대라 할만 했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고인의 말이 있다. “우리나라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다.(1995년 베이징)” 당시 정치권은 치졸한 보복으로 대응했다. 이제 보니 '4류 정치'도 너무 후한 평가였다는 생각이다. 하나 둘 빅맨들은 가고 스몰맨들만 남아 50년 전 흑백TV 시장같은 제 살 깎아먹기에 날이 새고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