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키네마·동방·애관·문화·미림·인영·오성·아폴로(중앙)·대한·부평·금성·인천·현대·자유…. 인천의 극장(영화관) 이름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엔 유난히 극장이 많았다. 대부분 동인천 일대를 중심으로 퍼져 있었다. 취미생활과 레저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절, 이들 극장은 시민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청소년들에겐 '꿈과 희망'을 주며 성황을 이뤘다. '시네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시민들은 '액션'과 '멜로' 등을 보며 삶에 찌든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곤 했다.

그 땐 개봉관에서도 좌석제는 형식적일 뿐이었다. 먼저 자리를 잡는 사람이 임자였다. 그래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보려면, 한바탕 난리를 쳐야 했다. 극장 측에서도 거의 '무제한'으로 관객들을 입장시켰다. 통로에 앉거나 서서 영화를 보는 일도 허다했다. 관람료가 비교적 싸다는 이유로, 서울에서 원정을 오는 이들도 있었다. 인천에서 흥행 영화를 관람하고 인천을 둘러보아도, 서울에서 보는 값에 견주었다고 한다.

일부 극장에선 '동시상영'을 기본으로 했다. 개봉이 지난 영화 두 편을 보여 주었는데, 개봉관보다 저렴한 맛에 드나드는 사람이 꽤 많았다. 비록 철도 지나고 화면 질도 좋지 않았지만,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이들이 주로 찾았다. '옛 일'로 치부하는 그런 기억들이 새롭다. 요즘엔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밀려 인천에서도 몇몇 극장만 겨우 명맥을 잇는다. 이렇게 극장은 특히 서민들의 삶을 어루만져 주는 구실을 톡톡히 했다.

그런데 유독 인천에 극장이 많았던 이유가 뭘까. 개항(1883년) 이후 신식 서양 문물이 계속 들어온 일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인천에선 이미 1895년 실내극장 협률사(協律舍)가 지금의 경동에 문을 열었다. 서울 최초 실내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1902년 개관했으니, 이보다 7년 빠르다. 서울 협률사는 황실과 국고 지원으로 지었지만, 인천 협률사의 경우 객주 출신 정치국이 세웠다. 이 협률사를 애관극장 전신으로 본다. 인천 협률사는 개관 무렵 남사당패나 성주풀이 같은 전통 악극을 공연했다. 1910년 신파극을 선보이며 축항사(築港舍)로 바꿨다. '축항'이란 명칭은 인천항 구축에 따랐다. 1921년엔 외화를 주로 상영하며 연극도 공연하면서, 이름을 애관(愛館)이라고 했다. 6·25전쟁 때 소실된 뒤 1960년 현재 모습으로 지어 애관극장으로 재개관했다. 논란의 여지는 존재하지만, 한국 최초의 근대 공연장은 애관극장으로 기록된다. 한국전쟁 후엔 애관을 중심으로 '시네마 거리'를 형성했다.

인천영상위원회가 이를 반영해 오는 24∼25일 애관극장에서 '영상포럼'을 연다. 영상을 통한 인천의 '도시 브랜드'를 키우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 기획됐다. '애관, 보는 것을 사랑하다'란 다큐멘터리를 관람하고, 오늘날 최고(最古) 극장으로 불리는 애관극장 관련 이야기도 나눈다. 올해 한국영화 100년을 맞아 영상 문화도시 인천의 위상을 바로 세웠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