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믿는 것, 동학은 '하는 것'
▲ 수운 최제우 선생 묘역 전경. (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산 75(묘) 소재)

이제 '논학문'을 본다. '논학문'은 동학의 학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파한 글이다. 서학과 동학에 대한 비교 설명이 흥미롭다. 글은 제자들과의 문답식으로 되어 있다.

(제자들이) 묻기를, “지금 한울님의 신령한 기운이 선생님께 내렸다고 하니 어찌 그렇게 되었습니까?

(최제우가) 답하기를, “가면 반드시 돌아오는 순환의 이법을 믿고 따랐느니라.”

묻기를, “그러면 선생님이 받은 도의 이름을 무엇이라 합니까?”

답하기를, “하늘의 도이니라.”

묻기를, “그것은 서양의 도와 다른 것이 없습니까?”

답하기를, “양학(洋學)은 우리 교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즉 주문을 외는 것은 같으나 양학에는 결실이 없느니라. 그러나 시대를 타고난 운수도 같고 주문을 외는 방법도 같지만, 그 교리는 다르니라.”

선생이 말하는 동학과 서학은 “운즉일(運則一, 타고난 운세는 같다), 도즉동(道則同, 주문을 외는 방법도 같다), 이즉비(里則非, 교리는 다르다)”로 정리된다. “타고난 운세가 같다는 말”은 이미 불교와 유학의 시대는 갔고 서학과 동학의 시대가 왔다는 말이다. 선생은 무조건 서학을 배척하려 하지 않았고 또 서학에 대항하여 동학을 만든 것이 아님이 여기서 드러난다.

선생이 구체적으로 말한 서학과 동학의 다른 점은 이렇다. 시시비비는 독자의 몫이기에 정리해놓기만 한다.

동학: 한울님의 섭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세상일을 감화한다. 저마다 그 본연의 마음을 지키고 그 기질을 바로잡아 그 타고난 천성에 따르면서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히 감화가 이루어진다.

서학: 한울님을 위하는 실속이 없고 다만 제 몸을 위한 방도만 빌 뿐이다. 몸에는 한울님 조화와 같은 신령함이 없고 한울님의 참된 가르침도 배울 수가 없다. 형식만 있고 실은 없으며 한울님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한울님을 위하지 않는다.

선생은 “한울님의 섭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세상일을 감화한다”하였다. 이는 노장철학에서 말하는 '무위이화'(無爲而化) 사상이다. 천도교에서는 이를 '전지전능으로 나온 자존 자율의 우주 법칙'쯤으로 여긴다. 인위적인 수단이 아닌 어떤 궁극적인 섭리에 의해 저절로 감화된다는 의미다.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묻기를, “도는 같다고 말하셨는데 그렇다면 선생님의 도를 '서학'(西學)이라 불러도 됩니까?”

답하기를, “그렇지 않느니라. 나 역시 동쪽나라 조선에서 태어나 동쪽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天道, 하늘의 도)지만 학문으로 말하자면 '동학'(東學)이라고 해야 한다. 더욱이 땅이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었는데 어찌 서쪽을 동쪽이라 하고 동쪽을 서쪽이라 하겠느냐.”

선생은 '천도'와 '동학'이라 하였다. 이는 동학이 종교와 분명 다름을 말한다. 종교는 '믿는 것'이지만 동학은 하나의 학문으로 '하는 것'이다. 사실 철학(哲學)도 그렇지만 종교(宗敎)라는 용어도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이규경도 <오주연문장전산고>, '석전총설'에서 불교를 '교'(敎), 혹은 '불씨'(佛氏)라 칭할 뿐이었다. 즉 서양의 'Religion'의 번역어인 종교와는 이해의 폭이 다르다. 1900년대가 넘어야 지금처럼 종교라는 말이 퍼졌다. 따라서 선생은 서양의 학에 대응하는 조선의 학으로서 동학을 말한다. 주체적인 우리의 학을 동학에서 찾은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선생은 동학과 서학을 분명히 가르라고 한다.

'수덕문'. 선생이 교인들을 가르쳐온 경험에 비추어 교인들이 덕을 닦는 올바른 방법을 제시한 글이다. 정성과 믿음을 강조했다. 맨 마지막 문장만 본다.

대저 우리 도는 마음으로 확고히 믿어야만 정성이 되느니라. 믿을 신(信) 자를 풀어보면 사람(人)의 말(言)이다. 사람의 말에는 옳고 그름이 있으니 옳은 것을 취하고 그른 것을 버리되 거듭 생각하고 또 거듭 생각하여 마음을 정하라. 한번 정한 뒤에는 다른 뒷말은 믿지 않는 것을 일러 믿음(信)이라 하니 이와 같이 닦으면 마침내 그 정성을 이룰 것이니라.

정성과 믿음은 그 법칙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말로써 이루는 것이니 먼저 믿고 뒤에 정성을 다하도록 하라. 내가 지금 밝게 가르쳤으니, 어찌 믿음직한 말이 아니겠느냐. 공경과 정성을 다하여 내 말을 어기지 말도록 하라.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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