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호 평택대 교수

인간의 독특성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이다. 동물들도 나름대로 언어를 사용하고 군집생활을 하지만, 인간만큼 언어로 사물을 설명하고,기억으로 저장하고, 함께 모여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하지만 인간이 언어를 발전시킴에 따라, 사람은 자기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언어가 개인을 대체하고, 심지어 언어가 개인을 지배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을 듣고서 그의 교양과 인격을 가늠하고 진심을 파악한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삶의 지배자, 판단자이며, 미래 예측가가 된다.

언어가 인간을 앞서면, 사람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만나고, 이해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사용하게 된다. 이렇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언어에 갇힌 로봇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로봇인간은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에 갇혀서 산다. 단단한 껍질을 갖추고, 자기 내부에서 나오는 말만 듣고 말한다. 프로그램화된 말 외에는 알아들을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지도 못하고, 서로를 이해하도록 돕지도 못한다. 프로그램에 따라 같은 논리의 말을 반복할 뿐이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로봇인간들이 증가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로봇정치인, 로봇비평가, 로봇댓글러, 로봇교육가, 로봇신앙인 등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특정 논리에 따라 말을 반복한다. 자기 회로에 따라 반복적으로 언어를 쏟아내는 것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임을 모른다. 자기 회로에서 나왔기에 자신은 정의롭게, 멋지게, 선한 일을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자기에게만 선한 일이다.

게다가 선한 의도가 꼭 옳은 일은 아니다. 가령, 자녀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승세의 주식을 사는 것은 선한 결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결정인가는 기다려보아야 한다. 주식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 의도가 아무리 선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결정일 뿐이다. 선한 의도가 곧 옳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전제이다.

최근에는 이 로봇인간에게 독심술 기능이 추가된 듯하다. 누군가 말을 하면 그 의도까지 파악해 낸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하면 앞으로 닥칠 일까지도 진단한다. 이 기능은 로봇인간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봇인간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기능을 장착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이니까 그렇다.

로봇인간이 활동하는 시간에 사람들은 괴롭다. 이때는 사람이 진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사람이 한 마디를 하면, 로봇인간은 프로그램에 따라 계속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하면, 로봇인간은 또 다시 프로그램에 있는 말을 반복하면서 다그칠 뿐이다.

사람들은 로봇인간 사이에서 지쳐간다. 그들과는 사람의 가치를 논하기도 어렵고, 서로를 존중하기도 어려우며, 다름의 미학을 꺼내기도 곤란하다. 거기에는 서로 사용하는 코드가 일치할 때만 우리 편이라는 판단만 남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대화가 될까? 언어나 로봇인간보다 사람을 앞에 두는 것이다. 로봇인간에게서는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면서 멀어져간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찾아갈 수 없다.

인간이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 언어를 사용하고 그로 인해 사람이 사는 세상, 상생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면, 로봇인간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 사람이 언어에 앞서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사람으로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자문해 본다. 나는 사람인가? 로봇인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