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조선의 서편 항구 제물포 부두 …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上海(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어제는 Hongkong(홍콩) 오늘은 Chemulpo(제물포) 또 내일은 Yokohama(요코하마)로,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포리탄.” 1927년 인천에서 발간된 문예지 <습작시대> 창간호에 박팔양의 시 '인천항'이 실렸다. 황해를 통해 세계로 열려 있던 인천항의 개방적 면모를 보여준다.

1927년이면 시인이 인천항에서 외국을 드나드는 여객선을 자유롭게 탈 수 있던 때다. 개항(1883년) 초기엔 기선들이 직접 인천항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비교적 큰 배가 월미도 남쪽 해상에 정박하면, 소형 배가 여객과 화물을 잔교 부두로 옮겨야 했다. 그러던 중 1918년 이중 갑문식 선거(船渠)를 완공하면서 획기적인 변화를 맞았다. 어지간한 선박들은 해수 높이에 구애를 받지 않고 드나들 수 있게 됐다. 수심(8~10m)이 깊어져 4500t급 외항선 3척을 동시 접안하는 규모를 갖췄다. 인천항은 그때부터 한참동안 국내 '대표 항구'를 자랑했다.

인천항은 8·15 해방을 맞아 중국과 일본 등지에 있던 동포들의 귀환 장소로도 유명했다. 그 무렵 고국으로 돌아온 해외동포는 250만여명에 달했는데, 이중 75만여명이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이처럼 외국을 오가던 여객선의 길이 끊긴 이유는 한국전쟁 탓이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대부분의 항만시설과 시가지가 파괴됐다. 인천항은 항만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냉전체제 아래서 외국 문호도 닫혔다. 이랬다가 1955∼1959년 '항만사업 5개년 계획'으로 재건돼 점차 제 모습을 찾아갔다.

인천항은 한국전쟁 발발 40년을 막 넘기면서 '역사적인 사건'을 맞이한다. 한-중 카페리(골든브릿지호)가 1990년 9월15일 첫 취항길에 오른 일이다. 이날 오후 4시 인천항을 출발해 산둥성 웨이하이(威海)항을 향해 떠났다. 주 2항차 운항으로, 한 항차에 승객 500명과 컨테이너 130개를 실었다. 총 350㎞ 항로에 17시간이 걸렸다. 이 배 취항으로 2년 후 한-중 수교를 순조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한-중 무역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역사적인 이슈를 만나 언론사마다 취재 경쟁을 치열하게 벌였던 기억이 새롭다. 골든브릿지호를 시작으로 인천∼중국 항로는 꾸준히 늘어 올해 기준 10개에 달한다.

한-중 카페리 첫 취항 후 30년이 흘러, 중국은 '거대한 나라'(G2)로 변모했다. 우리와 정치·경제·문화적 교류나 교역 등을 감안할 때,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여객운송이 끊겨 한-중 카페리 업계를 고사 직전으로 몰아넣는다. 처음으로 한-중 카페리를 운항한 위동항운측은 30주년 기념행사도 일찌감치 취소했다. 지난해만 해도 인천∼중국 카페리 여객은 103만여명이었지만, 올해는 여객운송 중단으로 업계를 정말 어렵게 한다. 코로나19 종식을 기다리는 카페리 업계에 “힘들지만 분투하라”고 말하는 일조차 민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