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간행한 월간 잡지 엔 인천과 관련한 일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1901년 1월부터 1906년 12월까지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지리 등을 망라한다. 이 중 '제물포 해전'에 대한 소식도 아주 상세하게 실었다. 해전이 일어난 배경과 과정, 결과 등을 소상히 적었다. 그 무렵 어떤 나라를 포섭하려면, 먼저 선교사들을 보내야 했던 서양 각국의 전략이 놀라울 따름이다.

“… 러시아 측은 '바략'(Varyag)호를 폭파하려고 했지만, '카라예츠(Koreets)'호 폭파가 너무 거대해 사령관들은 바략호를 그냥 침몰하도록 두자고 제안했다. 바략호는 이미 가라앉고 있었다. 41구의 시체는 아군 선박으로 이송되지 못했다. 싸우다 전사한 배의 한 선실은 그들의 무덤으로 변했다. … 러시아 함대 파멸은 제물포와 서울의 러시아인들을 놀라게 했다. 일본 정부는 모든 러시아 국민을 서울로부터 이동시킬 것을 권고했다. 며칠 후 이들 러시아인은 특별기차로 제물포로 이송됐다. 여기서 군인들과 합류해 '파스칼'호로 옮겨졌는데, 600여명에 달했다.…”

인천 앞바다에서 일어난 싸움에서 러시아는 일본에 무릎을 꿇었다. 러·일 전쟁 서막을 알린 제물포 해전은 1904년 2월9일 인천 해상에서 벌어졌다. 이 해전에서 러시아는 순양함 바략과 소형군함 카레예츠를 잃었다. 러시아 지휘관들은 위험한 순간을 맞자 자국 군함을 일본에 넘겨줄 수 없다고 판단해 침몰시키기로 했다. 이 때 숨진 러시아 해군 수병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해마다 블라디보스토크 해양묘지에서 열린다. 시민과 군인들은 제물포 해전 추모비 앞에 헌화하며 목숨을 잃은 수병들의 넋을 기린다.

인천시립박물관이 러시아 애국심의 상징인 바략함 깃발을 상설 전시중이다. 이 깃발은 러일전쟁 당시 인천 앞바다에서 일본함대와 전투를 벌이다 자폭한 바략호에 휘날렸었다. 바략함은 일본에 전리품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스스로 침몰을 선택했다. 러시아 국민 사이에선 국가에 대한 헌신과 희생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다. 광복 이후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한 이 깃발은 심하게 훼손된 채 남았다. 그래서 진품과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 복제품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깃발 옆엔 관람객 이해를 돕는 바략호 자폭 과정 흐름도와 포탄 조각 등도 함께 전시한다.

이처럼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천은 여러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다. 정작 인천과 주민과는 전혀 상관 없는 전쟁이었다. 한국전쟁 때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완전히 뒤바꿨지만, 그 후 한참동안 인천은 냉전(Cold War)에서 자유롭지 못한 도시로 머물렀다. 지난 15일로 인천상륙작전 70주년을 맞았다. 한국전쟁 승기를 잡아 유명한 작전으로 기록되지만, 당시 포격 피해를 본 '월미도 원주민'의 절규는 오늘도 계속된다. 북한과의 긴장 상태도 여전하다. 인천 앞바다에서 만인(萬人)이 평화롭게 지낼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