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전 탄생된 철도, 그 출발은 …

일제 야욕과 지주들 '한몫' 챙기려는 기대치서 시작

인천-수원-강원도 잇는 횡단열차 꿈꿨지만 투자 실패로 원점

어민분쟁 등으로 막대한 보상비 투입 후 1937년 개통

수인선은 욕망에서 탄생했다.

1883년 개항 후 조용한 어촌마을이던 인천은 한반도의 제1무역항으로 급부상했다. 인천은 수도 관문항 역할과 중계무역항 역할로 목포와 신의주 등 서해안 일대로 뻗어갈 물자의 중심으로 급성장해 1900년대 초까지 조선 총 무역액의 40~50%를 담당했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 개통으로 인천항 중계무역이 큰 타격을 입은 후 대외교역량은 1907년 45%를 끝으로 1916년 18%까지 끝없이 추락했다.

수인선 건설은 조선 수탈이란 일제의 야욕과 인천항의 호황을 기대한 인천상인들의 기대치로 탄생했다. 여기에 '한몫'을 기대 노린 지주의 요구치가 수인선 건설을 부추겼다. 1926년 인천상업회의소(현 인천상의)가 조선총독부에 '인천에서 수원을 거쳐 동해안 강원도 강릉에 이르는 횡단철도 부설 요망서'를 제출하며 “강원도 등 내륙 개발과 경부선 및 경인선의 수송부담 분산, 주안 등 서해안 관염(官鹽)의 내륙 공급을 원활히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수인선 노선은 '소래-남동-문학 해안을 종단해 문학면 관교리를 경해 인천'에 이르는 계획이었다.

1934년 경동철도사는 수인선에서 그치지 않고 강원도 원주(흥호리)와 횡성까지 뻗으려다 주식모집에 실패했다. 90년 후인 지금도 진행형인 인천을 시작으로 강원도에 이르는 횡단철도 계획은 당시 실현됐을 경우 또 다른 한반도 철길의 변곡점이 됐을 터였다.

수인선 계획은 정부 지원과 토지주·지역 주민의 반발로 시련을 겪었다. 철길에 따른 지역 발전과 땅값 상승 기대로 토지주와 지역 주민은 철길의 토지 수용을 강하게 거부했고, 정부(조선총독부) 또한 자금 지원 문제로 애를 태웠다. 하지만 수인선 철길 계획 발표와 함께 땅값이 들썩였고, 역사 건설안이 언급되며 다시 천정부지로 뛰었다. 수인선이 땅값을 놓고 속앓이를 한 대표적 사례가 있다. 1936년 5월16일 인천 화정매립지(신흥동)에서 수인선 기공식 후 토지 매수 과정에서 “시세와 맞지 않는다. 주변 땅값과 차이가 크다”며 토지주의 반발이 컸다. 요즘과 같이 땅값을 놓고 '헐값'에 사고 싶은 철도회사와 '제값'에 팔고 싶은 토지주의 분쟁이 발생했다. 1936년 7월5일 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용지 매수가 난관에 봉착했다. 철도회사와 지주 요구 가격에 차이가 크다. 회사가 수용령을 적용하겠다”고 전한다. 특히 당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송도유원지'에 따라 주변 땅값이 폭등한 것을 토대로 회사가 제시한 임야 45전(錢)과 지주 요구가 5원(圓)에는 10배 이상 차이가 났다. 100전이 1원하던 시대였다. 보상은 수인선의 근간을 흔들었다. 수인선 최대의 난공정인 소래철교는 인근 어민과의 분쟁을 초래했다. '경동철교 가설은 칠백어민 사활문제'라는 인식에 “소래철교는 어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며 반발이 컸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보상비가 막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인선 공사비는 당초 130만원에서 260만원으로 증액되며 경제성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주주간 갈등은 주식폭락과 맞물려 수인선 회의론까지 발생했다.

그러던 수인선이 '역(驛) 내정지 발표'로 기사회생했다. 역 내정지 발표는 수인선과 역 주변을 요즘과 같은 '역세권'으로 띄워놓았다. 이에 17개 역 내정지 발표는 수인선에 대한 역 인근 주민 등 일반인 기대로 투자가 활발해졌다. 당시를 언론들은 “수인선 개통으로 강원도 오지의 물자수송, 관염의 수송, 경성 물자의 반출, 송도유원지와 연계한 관광객 유치 등 인천과 중부조선의 개발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대서특필했다. 1937년 8월6일 개통 당시 52㎞의 협궤선인 수인선은 수원-인천간 1시간40분에 연결됐고 10개 정식 정차장, 7개 임시정류장으로 운행됐다. 수인선은 내륙의 미곡을 중심으로 하는 곡류와 소금 등의 집하로 인천항에까지 활황을 미쳤고, 개통 1년만에 협궤를 광궤로 개수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됐다. 또 일본인 상인으로 구성된 인천부세진흥회는 광궤화와 노선을 인천항역까지 확장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 후 수인선은 경쟁 노선 등으로 '물류'에서 '사람'으로 운송기능이 바뀌며 1940년대부터 운송 수익 적자로 돌아섰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탐사보도부=이주영·김원진·이창욱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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