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인 입에 집어넣은 해관 수입 통탄스럽다

개항·관세행정 개념도 없던 조선
1876년 부터 일본 무관세 나라로 인정
1883년까지 7년간 무역 호시절 누려

청국 이홍장, 독일인 묄렌도르프 '목인덕' 천거
1883년 6월 인천해관 설립 … 10월 원산·부산

해관 외국인들 모두 청 영향하에 고액 급여
해관장 월급 380불·외국인 최하 100불 받아
조선인 관리 15불·잡역은 고작 한전 5관문

묄렌도르프 친일 관세행정에 친러 행보
독단운영에 이홍장 눈 밖에 나 총세무사 해임

인천해관 1~8대 모두 서양인 세관장 자리에
일본, 청일·러일전쟁 연승 후 관세행정 장악
▲ 1883년 6월 16일, 묄렌도르프에 의해 창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해관인 인천해관 청사 전경. 영국영사관이 있는 올림포스호텔 언덕 아래쪽 중간 부근에 목조 단층 건물 로 지어 졌다. 부속시설로는 18평의 해관검사소와 32평의 보세창고가 있었는데 1885년 7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 묄렌도르프는 고종으로부터 민겸호(閔謙鎬)가 살던 집을 하사받았다. 민겸호는 임오군란 때 살해당해 흉가처럼 남아 있던 집이다. “고종은 그가 외교와 통상관계에 조예가 깊어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으면서 전동( 洞)에다가 집을 하사하였다.”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기록이 있다. 1884년 무렵 해관, 통리아문 관리들과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 묄렌도르프는 고종으로부터 민겸호(閔謙鎬)가 살던 집을 하사받았다. 민겸호는 임오군란 때 살해당해 흉가처럼 남아 있던 집이다. “고종은 그가 외교와 통상관계에 조예가 깊어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으면서 전동(磚洞)에다가 집을 하사하였다.”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기록이 있다. 1884년 무렵 해관, 통리아문 관리들과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 일본이 해관을 장악한 1906년, 세관 설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신축에 들어가 1912년 3월20일에 완공한 청사 건물이다. 세관 청사와 보세창고 등 부대시설을 합쳐 총 면적이 364평에 달했다고 한다. 물때에 맞춰 선박 접근이 용이하도록 잔교를 두었다. 청사 뒤쪽으로 영국영사관과 오른쪽 위 응봉산 정상의 존스턴 별장이 보인다. 사진엽서를 촬영한 것으로 1913년 6월 6일자 소인이 찍혀 있다./사진제공=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
▲ 일본이 해관을 장악한 1906년, 세관 설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신축에 들어가 1912년 3월20일에 완공한 청사 건물이다. 세관 청사와 보세창고 등 부대시설을 합쳐 총 면적이 364평에 달했다고 한다. 물때에 맞춰 선박 접근이 용이하도록 잔교를 두었다. 청사 뒤쪽으로 영국영사관과 오른쪽 위 응봉산 정상의 존스턴 별장이 보인다. 사진엽서를 촬영한 것으로 1913년 6월 6일자 소인이 찍혀 있다./사진제공=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

 

▲ 1926년 3월, 항동 7가 1-26번지 인천항 선거구내(船渠構內)에 옮겨 세운 3번째 세관 청사이다. 목조 3층 건물로 외관이 특이해 인천항의 또 하나 랜드 마크였다고 한다. 1950년 6·25전쟁 중에 소실되었다./인천일보 DB
▲ 1926년 3월, 항동 7가 1-26번지 인천항 선거구내(船渠構內)에 옮겨 세운 3번째 세관 청사이다. 목조 3층 건물로 외관이 특이해 인천항의 또 하나 랜드 마크였다고 한다. 1950년 6·25전쟁 중에 소실되었다./인천일보 DB

 

조선이 개항에 대한 의미도 제대로 모른 채, 바깥 경험도 견문도 없이 문호를 연 까닭에 개항장이 갖추어야 할 시설, 제도 어느 것 하나 마련된 것이 없었다. 수출입 물화를 관리하고 관세를 징수하는 해관(海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정부가 부산 개항 후에야 해관 존재의 필요성,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 전까지는 관세 행정에 대한 개념도 이해도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6년 8월에 합의한 조일무역규칙(朝日貿易規)에는 일본을 무관세(無關稅) 나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교활한 술수에 넘어가 그리되었다고 하는데, 1883년 해관이 열릴 때까지 무려 7년간이나 일본은 대한(對韓) 무역에서 무관세의 호시절을 누렸다. 당시 우리 정부 관리들의 수준이라는 것이 도무지 이렇게 어리숙하고 무지했던 것이다.

그 뒤 해관의 중요성과 그간의 실수를 깨달은 조선정부는 일본의 무관세 통상을 뒤늦게나마 되돌려 보려는 노력과 함께 개항장에 해관 설립을 추진한다.

한편, 국제사회를 향해 초조한 목소리로 “조선은 우리의 조공국”이라고 외치던 이홍장(李鴻章)은 이때가 조선의 통상권을 자신의 영향 아래 둘 호기라 여겨 막객(幕客)인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를 천거했고, 조선은 청국의 입김 그대로 해관 창설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묄렌도르프는 본래 청국 텐진(天津) 주재 독일영사를 지낸 전직 외교관으로, 1882년 11월 17일 참의통리아문사무(參議統理衙門事務)에 보임되면서 조선정부 외교 고문이 되며, 근대 한국정부 최초의 서양인 관리로 기록된다. 한문 이름이 목인덕(穆麟德)이어서 세간에서는 '목참판(穆參判)'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고종은 1883년 1월 23일(음력 12월 14일)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 민영익과 묄렌도르프를 해관 설립에 필요한 자금 조달과 해관 요원을 확보토록 청국 상해에 파견하였다. 상해에 파견된 묄렌도르프는 그곳 초상국(招商局)으로부터 차관을 얻고 청국해관에 근무하는 외국인 30명 정도를 초빙 고용하였다. 고종은 묄렌도르프를 총세무사(總稅務司)에 임명하였고, 1883년 6월 묄렌도르프의 주관 하에 인천해관을 설립하였다. 이어 10월에는 원산·부산해관을 설립하고 관세 징수를 개시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신편 한국사』 제38권에 보이는 내용이다. 이렇게 해관은 탄생했지만, 생각할수록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토록 허명뿐이었나 싶어 입맛이 씁쓸해진다. 관세제도는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장치인 동시에, 관세는 국가 재정 수입의 원천이 되는 것인데 이 같은 중요한 국가 업무를 모조리 외국인에게 맡겨두고 있으니…. 더구나 해관의 외국인들은 당시 청나라의 영향 아래 있지 않았던가.

이 비슷한 생각은 얼핏 윤치호(尹致昊)도 가졌던 듯하다. 해관 설치 이듬해인 1884년 8월 21일자 그의 『영문일기』에서 그런 느낌이 묻어난다.

 

1. 이홍장(李鴻章)의 천거로 조선에 온 묄렌도르프-목인덕(穆麟德)이 해관 창설의 임무를 맡으며 조선 정부의 외무부 격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협판정각사사무(協辦征榷司事務)라는 자리에 앉는다. ‘정각(征榷)’은 전매, 또는 정부의 독점사업 등을 이르는 말이며, ‘협판(協辦)’은 총괄 우두머리인 독판(督辦) 바로 밑의 부문별 책임자를 뜻한다. 1883년 12월 29일자 한성순보의 관원 현황보도이다. (사진출처·제공 :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자료)<br>
1. 이홍장(李鴻章)의 천거로 조선에 온 묄렌도르프-목인덕(穆麟德)이 해관 창설의 임무를 맡으며 조선 정부의 외무부 격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협판정각사사무(協辦征榷司事務)라는 자리에 앉는다. ‘정각(征榷)’은 전매, 또는 정부의 독점사업 등을 이르는 말이며, ‘협판(協辦)’은 총괄 우두머리인 독판(督辦) 바로 밑의 부문별 책임자를 뜻한다. 1883년 12월 29일자 한성순보의 관원 현황보도이다. (사진출처·제공 :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자료)

 

▲ 1901년 5월 13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묄렌도르프의 조문(弔文). 이홍장에 의해 소환되다시피 했던 목 씨는 청국에 체류하다가 <br>​​​​​​​이 기사가 나가기 약 한 달 전인 4월 19일 심경병(心經病)으로 중국 사망했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자료
▲ 1901년 5월 13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묄렌도르프의 조문(弔文). 이홍장에 의해 소환되다시피 했던 목 씨는 청국에 체류하다가
이 기사가 나가기 약 한 달 전인 4월 19일 심경병(心經病)으로 중국 사망했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자료

 

목인덕 묄렌도르프를 고용하는 계약서[合同書]와 세관에서 고용한 외국인 수를 적은 것을 얻어 보았다. 인천(仁川)·부산(釜山) 두 항구는 외국인이 16인씩이고 원산(元山)이 10여 인이다. 믿을 만하다. 외국인이 비난하여 말하기를, “조선해관의 수입은 고용인 월급 지급하기에도 넉넉하지 못하다”고 한 말을 이로써 알 수 있겠다.

고액의 급료를 받는 다수의 외국인들이 해관을 쥐고 있는데 대해 편치 않은 심사(心思)를 내비친 것으로 보이는데, “믿을 만하다”는 말투가 묘한 여운을 풍긴다.

특히, 두 달 치 월급이면 양관(洋館)을 한 채 지을 수 있었다는 그들의 고액 급료는 인천의 향토사학자 최성연(崔聖淵, 1914∼2000) 선생의 『개항과 양관 역정』에 자세히 나온다. 비슷한 내용이 『인천세관120년사』에도 있음은 물론이다.

해관장의 월급이 양은(洋銀) 380불, 보좌관이면 300불, 기외(其外) 직원(관리)도 외국인의 경우는 최하 100불 전후인데 비하여, 조선인 관리는 15불에 지나지 않으며, 선원 잡역 등 용원급(傭員級)은 한전(韓錢) 5관문(貫文, 월급)이 고작이었다.

나라의 돈주머니, 해관 운영을 남의 손에 맡겨두고, 또 그 수입의 상당액을 조선인이 아닌, 저들 외인들 입에 집어넣는 꼴이니 윤치호의 일기 행간에 배어 있는 분함과 우려와 탄식은 백 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해관 창설 후 묄렌도르프는 일본과의 관세 교섭에 있어 독단적으로 저율의 세율을 적용하면서 수세(收稅) 업무까지 일본제일은행에 위탁하는 등 친일 관세 정책을 폄으로써 해관은 더욱 유명무실해진다. 거기에 묄렌도르프가 정치적으로 친 러시아 행보를 보이면서 이홍장의 눈 밖에 나게 되고, 결국 이홍장의 압력을 받은 조선정부는 1885년, 3개 해관을 총괄하는 총세무사(總稅務士) 묄렌도르프를 해임한다.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승한 일본은 1906년 마침내 해관의 명칭을 세관(稅關)으로 바꾸면서 한국의 관세 행정을 장악해 버린다. 한국은 창설부터 23년 동안 단 한 차례도 해관을 스스로의 손으로 운영해 보지 못한 채, 이번에는 서양인에서 일본인으로의 자리 바뀜만을 속절없이 바라보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빗나간 개항장에 빗나간 해관! 인천해관 역시 1883년 부임한 초대 해관장 영국인 스트리플링(A. B. Stripling)부터 1905년 8대 맥코넬(W. Mckonnel)에 이르기까지 영국, 독일, 불란서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다가 일인 세관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같은 해관 이야기를 엮으면서, 마음 한편 기대와 위안을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해관 출신 우리 한국인 관리들이 벌인 인천에서의 활약 때문이다. 여러 명 인천해관 방판(幇辦)들은 인천사립제령학교(仁川私立濟寧學校)에서 야간에 생도들을 모아 놓고 신학문과 영어 교육에 힘쓰기도 했었던 것이다.(2020. 9. 10. 인천일보 원고)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