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딸들이 선별한 1등품 쌀, 일본인 밥상 위로


처음엔 도정하지 않은 벼 그대로 수출
왕겨 포함돼 부피 커 선적·운임에 문제

신토오, 1889년 첫 기계식 정미소 개소
이후 일본 상인 너도나도 업계 뛰어들어
민족자본으론 1924년 유군성정미소 최초

여공 2000여명 멸시·박봉 속 선미 작업
'호품'은 일본인 몫…한국인에겐 2등품 팔아

 

▲ 리키다케정미소에서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여공들이 선미(選米)작업을 하는 광경이다. 이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쌀에서 돌과 뉘를 골라내는 일을 했다. 매일 아침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채 수많은 여공들이 긴담모퉁이 길을 통해 출근하는 풍경을 적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1934년 4월 29일자 조선신문에 실린 인천수이출백미제조조합(仁川輸移出白米製造組合) 광고. 애초 일본인 정미소 12개 업체가 결성한 인천정미조합(仁川精米組合)이 회원 수가 늘어나 크게 확장했던 것이다. 총 22개 회원 업체 가운데 유군성, 이흥선, 이순일(李順日), 김태훈, 김신(金信), 김형환(金衡煥), 주명기 등 7개소의 한국인 정미소 상호가 보인다.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자료

 

▲ 초창기 인천항 한국인 정미소의 대표자 격인 주명기와 이흥선에 대한 1935년 11월 20일자 매일신보 기사이다. 이들은 1920년대에 정미소를 차려 20년 이상 일본인이 독점하던 인천항 정미업계에 한국인 업자로서 발판을 마련한 인물들이다.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자료

 

무력에 이어 감언이설로 제물포 개항을 재촉하던 일본의 속셈 중에 제일 먼저 노렸던 것이 쌀이었다면, 개항이 된 마당에는 조선의 쌀을 실어가는 것이 저들로서는 급선무였다.

실제 처음 수출 형태는 도정(搗精)을 하지 않은 벼 그대로의 수출이었다. 제물포에 대규모 도정시설 없었기 때문에, 급한 김에 타작한 벼를 그대로 섬 채 실어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겨를 벗기지 않은 벼는 부피가 커 선적과 운임의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매갈이간이었다. 매갈이간은 진흙과 석회로 만든 큰 맷돌을 사용하여 왕겨를 벗기는 도정시설이었다. 그러나 이 시설은 도정 과정에서 돌이나 흙 같은 이물질을 걸러내지 못하는 결정적인 흠이 있었다.

잠시 1912년,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仁川朝鮮人商業會議所)에서 발간한 『상계월보(商界月報)』의 글을 보자. 당시 서기장(書記長) 강전(姜筌)이 인천의 한국인 미상(米商)을 둘러보고 쓴 글이다.

 

인류 생활상 가장 긴요한 것이 곡물이다. 그 중에 조선의 미곡은 세인이 칭도(稱道)하는 호품(好品)이다. 그러함에도 농작인이 수확한 벼는 피도기(披稻器)를 사용하여 벼이삭을 취하지를 않고 항상 농장 지면에서 타취한 때문에 돌이 혼입됨을 면치 못하여, 또 정미(精米)한 뒤에도 돌이 반입됨을 피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미곡에서 돌을 습거(拾去)하는 습관이 원래부터 없었기 때문에 이들 품열(品劣)한 쌀을 가지고 밥을 지어 먹은즉 왕왕히 돌을 씹어 치아가 손상되는 폐단이 있을 뿐 아니라 이는 상품을 선량히 선택치 못하여 위생을 중시치 아니한 것이다. 이 같은 폐단뿐만이 아니라 원래는 양호한 쌀을 판매해야 됨에도 그 정춘(精春)하는 방법이 심열(甚劣)해서 상당한 값을 받지 못하니 엇지 영업상의 결점이 아니리오.

미곡상 제씨는 돌 고르는 법에 주의하여 완전한 곡식을 만든 자는 높은 값을 받고 팔고, 밑지는 곡식을 만든 자는 헐값을 받고 팔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요. 인류 위생상에 이익도 보급케 하고 판매함에서도 값에 손실이 안 가기를 미상 제씨에게 후히 바라는 바이다.

▲ 리키다케정미소(力武精米所). 1904년 설립된 초창기 일인 정미소로 대표격이었다. 한국인 고용자들을 착취하여 1930년대 수차례에 걸쳐 노동쟁의가 일어날 만큼 악명을 떨쳤다. /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리키다케정미소(力武精米所). 1904년 설립된 초창기 일인 정미소로 대표격이었다. 한국인 고용자들을 착취하여 1930년대 수차례에 걸쳐 노동쟁의가 일어날 만큼 악명을 떨쳤다. /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한국인의 쌀 수확 방법, 타성에 젖은 소홀한 정미, 허술한 관리의 폐단을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의 지적대로, 만약 인천항에서 제대로 도정을 거쳐 이물질을 걸러낸 온전한 백미 상태로 수출을 했다면, 몇 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 가장 먼저 착안한 인물이 약삭빠른 일본인 신토오 카노스케(進藤鹿之助)라는 업자였다. 그는 1889년 3월, 인천 중구 중앙동 4가에 인천정미소(仁川精米所)를 차렸던 것이다. 시설이 빈약했다고는 하지만 이 정미소가 인천항 최초의 기계식 정미소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어 1892년에는 미국계 타운센드상회에서 중구 송학동 3가 5번지에 엥겔식 정미기 4대를 들여다가 정미소를 차린다. 이 기계는 미국에서 발명된 증기(蒸氣) 동력 정마기(精磨機)로 도정의 질과 양에서 인천정미소를 훨씬 능가했다. 이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로 기록된다.

정미업을 경영하는 것이 인천항에서 미곡 수출의 주도권을 잡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 상인들은 너도나도 정미업에 뛰어들었다. 1904년 다카노정미소(高野精米所)를 비롯해 리키다케정미소(力武精米所) 등이 생기면서 1910년까지 5개의 정미소가 중구 지역에 문을 연다. 1924년에는 인천항에 자리잡은 일본인 대형 정미소 10개소와 경성에 본점을 둔 2개의 지점 격 정미소 등 총 12개의 정미소가 저들끼리 인천정미조합(仁川精米組合)을 결성해 버젓이 신문광고를 내는 지경에 이른다.

그나마 한국인으로서 정미소다운 정미소를 연 인천 최초의 인물은 유군성(劉君星)으로 1924년 4월, 신흥동에 유군성정미소를, 그리고 뒤를 이어 1925년 9월에 주명기(朱命基)가 유동에 주명기정미소를 개업해 인천항에서 한국인 정미소 경영의 싹을 틔운다. 그 후 김태훈(金泰勳), 이흥선(李興善) 등이 정미소를 열어 민족자본에 의한 인천항 정미업의 발판을 마련한다.

미두취인소가 열리고 정미소가 돌아가는 국내 최대 미곡집산지 제물포에서 그렇다면 주민들은 과연 무엇을 얻었을 수 있었나. 다시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의 기록들을 보자.

▲ 1919년에 설립된 가토정미소(加藤精米所) 전경. 이 정미소 역시 1920~1930년대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 지불, 그리고 폭언과 구타 등을 일삼아 파업과 쟁의의 대상이었다. /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1919년에 설립된 가토정미소(加藤精米所) 전경. 이 정미소 역시 1920~1930년대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 지불, 그리고 폭언과 구타 등을 일삼아 파업과 쟁의의 대상이었다. /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공장 직공의 반가량이 정미소에서 일하는 선미여공(選米女工)이었고 출퇴근 시간이면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앞치마에 도시락을 한 손으로 가린 채 긴담모퉁이를 돌아나가는 선미여공의 물결은 가히 장관이었으며 인천서만 볼 수 있었던 특이한 장관이었다.

2000여명 선미공들의 출퇴근 행렬을 장관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쌀에 든 돌과 뉘를 골라 일본인 밥상에 올리기 위해 하루 종일 일급 몇 십 전에 온갖 멸시와 능욕을 당했음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어찌 장관일 수 있을까. 이 풍경은 한국 쌀을 골라 저들에게 내주면서 인천 처녀들이 받은 치욕일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다.

각 정미소는 기계 감독에는 일본인이 그리고 인부는 주로 노임이 저렴한 일급제의 한국인을 썼으며 원료미는 경기, 황해, 충청, 평안도 산이었고 제품은 2등품으로 나누어 1등품은 주로 경인지방의 일본인에게, 2등품은 한국인에게 판매하였으며 수출미는 1등품을 3등급으로 나누어 주로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한국 쌀의 정미는 태반이 일본인 정미소에서, 일본인 감독 밑에 노임이 저렴한 일급제 한국인 인부, 여공의 손에서였다. 거기에 “세인이 칭도하는 호품” 1등품 쌀은 경인간의 일본인이 먹고, 2등품은 한국인이 먹었다는 사실! 이것 또한 빗나간 쌀 개항장 제물포로부터 주민들이, 한국인들이 돌려받은 대가였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