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굴서 노름한 미두쟁이, …피같은 토지·재산 빼앗기다
▲ 미두취인소 거래 장면. 일확천금의 신기루를 잡으려고 모여든 조선인 미두꾼들이 장내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br>​​​​​​​/사진제공=인천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 미두취인소 거래 장면. 일확천금의 신기루를 잡으려고 모여든 조선인 미두꾼들이 장내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사진제공=인천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인천 객주들 활동 방해하기 위해

일본 상인들·영사 '미두거래소' 세워

'옭아매기' 수법으로 조선 미곡 직거래

인천항 객주 손발묶고 유통조직 와해

곡물 넘어 민족자본 수탈까지 이어져

시골 지주들도 돈 벌겠다 인천 상경

15년동안 미두장에 바친 돈만 수억원

▲ ‘피 빨아들이는 악마굴’이라는 원성을 들었던 인천미두취인소 건물. 일본은 1896년 5월 미두취인소를 설치하여 인천항을 통한 미곡 수탈은 <br>물론 우리 서민의 토지, 재산을 휩쓸어 갔다. 1931년 경성취인소와 합병되어 기미(期米) 거래만 취급하는 조선취인소로 격하되었다.<br>/사진 제공 =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피 빨아들이는 악마굴’이라는 원성을 들었던 인천미두취인소 건물. 일본은 1896년 5월 미두취인소를 설치하여 인천항을 통한
미곡 수탈은 물론 우리 서민의 토지, 재산을 휩쓸어 갔다. 1931년 경성취인소와 합병되어 기미(期米) 거래만 취급하는 조선취인소로 격하되었다.
/사진 제공 =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피 빨아들이는 악마굴' 장탄 기사도

삼백만원 거금 번 미두쟁이 반복창

초호화 결혼식에 대저택 건축 준비

3~4년 만에 전재산 날리고 사망

'인천경제 미두꾼 원한서린 돈이 지탱'

'인천항 치부지만 지나친 표현 아냐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 1894년부터 우리나라를 4차례나 방문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는 저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일본을 “군사작전의 특징 중에서 가장 장기가 되는 '갑작스런 옭아매기'를 민첩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수행'하는 나라”로 표현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벌인 전격적인 일련의 군사 행동을 빗댄 말이다. 개항 이후 인천항에는 조선 객주(客主)들이 각지에서 실려 오는 미곡의 집산(集散)을 도맡아 오고 있었다. 미곡뿐만 아니라 인천항에서 거래되는 모든 물화의 상권까지 쥐고 있었다.

청일전쟁에서의 승전으로 기세등등했던 일본 상인들은 이것이 못마땅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방해공작으로 내놓은 것이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의 설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상인들은 인천객주회 또는 인천항신상협회라는 단체 아래 단합하였던 객주들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이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단체를 만들었는데, 1896년 5월에 설립된 인천미두거래소(仁川米豆去來所)가 바로 이것이었다.

인천미두거래소는 쌀값의 적정화와 품질의 표준화를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기관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한국정부와는 하등 협의 없이 인천 일본영사관의 인가를 받아 설립하였고 일본에 수출되는 미곡과 대두의 거래를 중개했을 뿐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는 면사 및 면포 등의 거래도 중개하는 역할을 하였다.

미두취인소는 조선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구였다. 청일전쟁에서 했던 것처럼 우리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들 영사(領事)와 업자끼리 '자유롭고 민첩하게' 또 한 번 '갑작스런 옭아매기' 수법을 썼던 것이다. 그럴 듯한 설립 이유를 내세웠지만, 이참에 인천항 객주들을 통해 넘겨받던 미곡을 저들이 직거래함으로써 객주들의 손발을 묶고 유통조직까지 와해시킬 의도였다.

문제는 미두취인소 설치로 인해 객주들만 옭아매진 것처럼 보이지만, 점차 상당수의 우리 국민들까지도 거기에 휩쓸려 들어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미두취인소에서 거래되는 쌀과 콩 같은 곡물뿐만이 아니라, 나아가 조선 경제의 수탈, 곧 민족자본의 수탈로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이다.

한국 사람이 기미의 특성을 알고 미두장으로 모여든 것은 1915년 이후 약 15년 동안이었다. 합방 이후 벼슬길도 막히고 장사거리도 없는 시골의 대소 지주들이 돈을 벌어 보겠다고 인천으로 찾아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취인소의 정체와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가 변동을 예측하는 데는 정부의 식량정책, 경제동향의 판단, 천기예보의 분석 등 정보와 자료가 필요한데 취인소와 중매점에 비해 미두꾼에게는 너무도 아는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몇몇 미두점이 단합하면 미가를 조작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미두꾼은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에게 맨손으로 덤비는 격으로 언제나 손해를 보게 마련이었다.

 

▲ 당시 미두취인소 중매점(현재의 증권회사 지점 격)은 20여 개에 달했는데, 한국인 중매점은 4개에 불과했다. 한국인 정미업자 유군성(劉君星)과 개성부자 강익하(康益夏)의 중매점 광고./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자료
▲ 당시 미두취인소 중매점(현재의 증권회사 지점 격)은 20여 개에 달했는데, 한국인 중매점은 4개에 불과했다. 한국인 정미업자 유군성(劉君星)과 개성부자 강익하(康益夏)의 중매점 광고./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자료

 

이 딱한 내용은 신태범 박사의 다른 저서 『인천 한 세기』에 나온다. 이토록 무지했던 한국인들이 그 15년 동안 미두장에 바친 돈이 줄잡아 수억 원이 될 것이라고 이 글에 이어 신 박사는 탄식하듯 적고 있다. 1924년 8월호 『개벽(開闢)』 잡지에도 미두취인소를 「피 빨아들이는 악마굴」이라며, “조선인의 생활난이 여기에서 일어나고 장차 조선인 공사(公私) 경제의 파멸이 이로부터 다 닥칠 날이 멀지 않다”는 장탄(長歎)의 기사가 실린다.

처음 근기(近畿) 좌우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점차 삼남 각지의 쌀을 긁어 들이는 판에 어쩌다가 한번 천행으로 장님낚시(無鱗釣)에 물리는 고기와 같이 항하사(恒河沙)의 일립(一粒)만치라도 먹었다 하면 아아 이때가 일확천금할 천재일시(千載一時)라 하여 농부는 괭이를 던지고 상고(商買)는 수판을 버리고 어부는 낚대(釣竿)를 꺾고 너도나도 들어 덤비다가 밑천까지 잘리게 된 결과는 전당(典當)질로 전당질은 영원 방매(放賣)로 마침내 귀신도 모르게 선조의 신주까지 들어먹고 형제처자가 이산하여도 어느 뉘가 말 한마디 불상타고 않는 것이 이 미두쟁이의 노름이다. 이렇게 경기 이남의 피를 흡진한 독아(毒牙)는 다시 서북(西北)으로 옮기어 적다 많다 할 것 없이 닥치면 닥치는 대로 막 먹어 들어간다.

 

이것이 광풍처럼 전국을 휩쓴 투기거래, 곧 기미(期米)의 결과였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할까. 인천시민으로 미두에 손을 대 크게 실패했던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하기야 인천의 일반 서민의 대부분은 부두 근처에 목을 매고 그날그날을 살았을 터이니 투기에 걸 현금이나 토지가 있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성공을 거머쥔 몇 명의 이름은 보인다. 그 하나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반복창(潘福昌)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강화출신으로 관리였던 아버지를 어려서 여의고 홀어머니와 인천으로 이주해 일본인 미두 중매점(仲買店)에 사환으로 있었다. 그는 중매점에서의 풍부한 경험과 특히 영민했던 머리로 3백만원이라는 거금을 벌어 일약 미두왕(米豆王)에 등극했던 인물이다.

부를 거머쥔 그가 서울장안의 미인으로 이름난 '원동(苑洞) 재킷'의 언니 김후동(金後童)과 인천부윤까지 참석해 치른 호화판 결혼식에 대해 여기에 다 쓸 수는 없으되, 용동 옛 신신예식장 터전 3백 평에 그가 큰 주택을 지으려고 쌓았던 축대만은 지금도 남아있음을 적는다. 그러나 그 후 3∼4년 사이, 결국 그는 이 모든 돈을 허무하게 다 날리고 병상에서 신음하다가 1941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투기놀음에 빠진 사람은 언제나 신기루같이 어른거리는 성공의 얼굴만 본다. 그래서 반복창과 같이 투기의 악마굴에 옭아매진 각처의 지주들은 끝내 피 같은 토지와 재산을 일본의 간상(奸商)들에게 모두 빨렸던 것이다.

“인천항 발전사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으나 당시 인천의 한국인 경제는 미두꾼의 원한서린 돈이 지탱하고 있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라는 신 박사의, 빗나간 개항장 제물포에 대한 뼈아픈 지적이 오늘도 철썩이는 서해 물결소리처럼 귓가에 선명하게 남는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