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논설위원

독일의 시인_극작가인 렌츠는 괴테보다 더한 천재였음에도 괴테에게 견제를 당해 생전에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괴테는 렌츠를 정도 이상으로 비난했지만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문화권력의 핵심인 괴테의 말 한마디는 진리나 마찬가지였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렌츠는 1781년 러시아 모스코바로 떠났고, 11년 뒤 빈민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미국의 앨 고어는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실상 이기고도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총득표에서 부시보다 33만8000표 앞섰지만 각 주의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특이한 미국 대통령 선거방식과 재검표 중단에 의해 패자가 됐다. 미국 선거제는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아프리카 언론들조차 비꼬았지만, 고어는 “국민 분열을 막고 민주주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결과를 수용한다”고 밝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 장군은 아군은 물론 적으로부터도 '기동전의 귀재'로 인정받았다. 영국 몽고메리 장군은 늘 롬멜의 사진을 갖고 다녔고, 언젠가는 그를 만나게 되기를 고대했다고 한다. 스포츠맨십을 중요하게 여기는 영국인들은 롬멜을 영웅으로 간주했다. 이런 그가 자신을 철저히 신임했던 히틀러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밖에 러시아혁명을 완수하고도 레닌에게 '사회주의 태두' 자리를 빼앗기고 스탈린에게 죽임을 당한 트로츠키, 절친한 친구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도둑질당한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마이트너,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암호기를 최초로 해독해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하고 현대 컴퓨터의 토대를 만들었지만 동성애자라는 비판에 자살한 영국 수학자 튜링 등등.

승자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업적을 이뤘음에도 결과적으로 패배한 사람들이 많다. 독일 언론인 슈나이더는 “패배자들은 대개 치열함과 처세술이 부족하고, 승리와 명예는 끈질기고 술수와 권력욕이 강한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패배자들이 죽어서나마 새롭게 조명받고 정당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다행스럽다. 세상을 뒤덮을 만한 천재성을 갖췄음에도 세상을 잘못 만나 한번의 반짝임도 없이 스러져간 이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각광받는 것은 늘 승리자다. 우리는 승자에게 환호하고 승자의 전설을 만들며 승자의 발자취를 배우려 한다.

그러나 승리자가 가득찬 세상보다 나쁜 것은 없다. 오로지 승리와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만 있으면 얼마나 숨막힐 것인가. 그나마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은 훌륭한 패배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