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현 MBC '생방송 오늘저녁' 작가

그때는 몰랐으며, 더 빨리 알았으면 사는 데 수월했겠다 싶은 것들이 많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아련해지는 것들도 있다.

학생 때 선생님, 교수님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무기력해 보인다'였다. 숙제·과제도 제대로 안 하기 일쑤였고, 시험공부는 전날 밤 끄적대는 게 다였다. 교내 행사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바로 지금, 쉽게 현재를 즐기는 것이었다. 웃고 떠들고, 깊고 깊은 밤까지 길바닥을 흥청망청 떠도는 일 같은 것. 지금이 아닌 훗날, 어딘가 모르는 곳으로 향하거나 그 준비를 하는 일은 나에겐 고생 그 자체였다.

그래서 훗날의 성취를 위해 공부하고, 토론하고, PPT를 만들지 않았다(그땐 이 고생이 내 미래에 도움이 될 거란 것도 몰랐다). 지금 당장 내가 즐겁지 않으니까. 30대가 된 나는 그때의 나를 베짱이라고 칭한다.

개미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릴 때, 베짱이는 노래를 부르며 현재를 즐겼다. 다만, 베짱이와 내가 다른 점은, 나는 닥치지도 않은 미래가 걱정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뭘 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뿐이다.

나는 과보호 아래 자랐다. 서른 전까지 늘 내 방은 깨끗했고, 옷은 제 때 세탁되어 있었다. 고등학생 때까진 선생님들도 매일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줬고.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재밌는 건, 그런 사람이 밖에선 참 잘도 일했다는 것이다. 18살 패스트푸드를 시작으로, 호프, PC방, 식당, 주차 도우미, 호텔 서빙, 콜센터, 영화관 등 하여튼 웬만한 서비스업계에선 다 일 해봤다.

심지어 즐겼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하는 것 자체가 재밌었다면 믿길까. 사람을 대하는 것이 재밌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재밌고, 나아가 이다음엔 뭘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도 재밌었다. 그래서 잠시, 이게 내가 앞으로 먹고살 방향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재밌어서 참 오래도 했다.

내가 가장 즐겁게 일한 곳이 있다. 21살부터 22살까지 일했던 술집인데, 어묵탕을 메인 안주로 내는 일본식 선술집이었다. 사장님이 연세가 많았는데, 나와 성씨가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내 성격이 서글서글하다고 하긴 어려운데, 그 사장님이 날 참 예뻐하셨다.

테이블 번호를 외우고, 주문을 받아 포스에 찍고, 안주가 언제 나오나 주방을 체크하고, 서빙하고. 손님이 나간 후엔 신속히 테이블을 치우고. 떨어진 술을 전화 주문하고, 틈틈이 홀과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들. 가게 안에 울려 퍼지는 노래들을 선곡하는 것도 내 재량이었다. 단골손님에겐 마음껏 음료와 어묵탕을 서비스할 수도 있었다.

굉장히 재미없게 일했을 때도 많았는데, 공통점은 둘. 시키는 대로나 잘해야 하고, 인간관계를 어떻게 공작(?)하느냐가 주 이슈였던 업장들이었다.

그렇다. 사실 나는 나 자신이 주체적일 때, 그리고 그 안에서 뭐가 됐든 간에 성취해냈을 때 기뻐하는 인간이었다. 코딱지만 한 칭찬과 인정에 기뻐하고, 나아가 뭔가 해낸 나 자신에게 내가 기특해하고.

절대 부모의 과보호와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이 개인의 주체성을 꺾는다며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찌 됐든 멋대로 이 지경으로 실컷 커버린 건 나였으니까. 나 자신도 내가 그때 즐거웠던 이유를 불현듯 요즘에서야 깨달았으니. 이러저러하게 자란 나는 이러저러하게 살았고, 지금 아는 것을 그때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거란 얘기다.

요약하자면, 불현듯 뭔가를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이 글이 읽는 이에게 '그때는 몰랐던 것'을,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인 것'으로 재인식 할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라본다.

 

※3040 세대는 우리 사회의 허리이자 미래 한국을 이끌어 갈 주역입니다. 인천일보는 우리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이들의 목소리를 적극 환영합니다. 테마나 분야에 상관없이 기고해 주시면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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