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체제 붕괴·국제적 불안이 만든 '동학'
▲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가 그린 수운 최제우 영정.(1915년 작품으로 1978년 발행된 화집 <이당 김은호>에 실려 있다.)

 

“삼정승도 무식하고 육판서도 무식하며 온갖 벼슬아치가 다 무식하더군요. 책을 읽지 않아도 부귀를 얻기에 걱정이 없거늘, 무엇하러 입이 부르트고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고생하며 학문을 닦겠는가? (三公絳灌也,六卿_灌也, 百司庶司皆_灌也, 不讀書, 不患不富貴, 何苦傷吻血指而至)”

수운 선생과 비슷한 시기를 살아낸 남종현(南鍾鉉, 1783~1840)이란 문인의 <증장동자서(贈張童子序)>에 보이는 글이다. 조선후기를 저 문장과 한 묶음으로 엮을 수 없지만 이미 세도정치가 온 나라를 점령한 시대였다. 제아무리 입이 부르트고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한무릎공부를 착실히 한들 출세 길은 이미 막혀버린 세상이었다. 선생 같은 이에게는. 그 중심에 과거가 있었다.

사람살이란, 그제나 이제나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 선생은 유학(儒學)을 숙주(宿主)로 조선을 난장판(亂場-판)으로 만들어버린 과거(科擧)를 버렸다. 선생이 살아내기 위해 찾은 학문은 동학(東學)이었다.

선생의 본관은 경주(慶州) 최씨로 초명은 복술(福述)_제선(濟宣), 개명한 이름이 제우(濟愚)이다.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_수운재(水雲齋)를 애용하였다.

선생은 경북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1824년 음력 10월28일(순조 24) 몰락 양반인 근암 최옥(崔_, 1762-1840)과 재가한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옥은 두 부인과 사별하고 63세에 30세쯤 되는 세 번째 부인을 맞았으니 이이가 선생의 어머니인 한씨 부인이다. 한씨 부인은 최옥의 제자 고모로 20세에 남편과 사별한 과부였다. 재가녀의 자식은 재주가 있어도 쓰이지 못할 때였다. 문중에서도 집안에서도 동네에서도 선생은 천덕꾸러기였다.

어릴 때 동네 아이들이 “저 복술이 놈의 눈깔은 역적질할 눈깔”이라고 손가락질하자 “오냐! 나는 역적이 되겠으니 너희는 착한 사람이 되거라”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선생은 어린 시절 1811년에 양자로 들인 형님 최제환(崔濟_, ?-1879) 내외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1833년 10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1840년 17세 때 아버지가 사망한다. 선생은 이 아버지에게서 유학을 배웠다. 부친 최옥은 퇴계 학풍을 정통으로 계승한 유학자였다. 당시 문인들이 존숭하여 산림공(山林公)이라 불렀다 하는데 12번이나 초시에서 낙방한 불우지사였다.

선생의 세계(世系)를 보면 먼 조상이 신라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며 7대조 최진흥(崔震興)(본래 7대조는 최진립(崔震立)이다), 6대조가 승사랑(承仕郞) 최동길(崔東吉)이다. 최동길은 최진립의 4남으로 최진흥의 후사가 되었다.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 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가 내려진 무관이었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 양반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집안 덕인지 선생은 총명하여 일찍부터 경사(經史)를 익혔다. 하지만 기울어져 가는 가세와 함께 조선 말기의 체제 내부적 붕괴 양상 및 국제적인 불안정이 선생의 유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재가녀 자식이기에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선생은 19세인 1842년 울산박씨(朴氏)와 혼인하였다.(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와 혼인하였고 4년 뒤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기록도 있다.) 20세에 화재로 생가가 전소되자 전국을 유랑하며 구도의 길을 찾는다. 이 시절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_복술(卜術) 따위 잡술(雜術)에 관심을 보였고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31세인 1854년까지 유불선 삼교, 서학, 무속, 도참사상을 두루 접하였다. 32세인 1855년에 <을묘천서(乙卯天書)>를 얻고 1856년 여름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근처에 있는 천성산(千聖山)

에 들어가 구도(求道)하였다. 1857년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하였으며 36세인 1859년 10월 처자를 거느리고 경주로 돌아온 뒤 구미산 용담정(龍潭亭)에서 계속 수련하였다.

드디어 선생이 37세인 1860년 음력 4월5일, 오전 11시 하늘님(상제[上帝], 천주[天主])과 문답 끝에 동학을 창시하였다. 선생이 하늘님에게 정성을 드리고 있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왔다. 선생은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동학을 확립시켜나갔다. 1년 동안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하고,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었다. 이를 ‘천사문답’이라 한다. 이때 하늘님에게 무극대도(無極大道, 더할 나위 없이 가장 크고 위대한 가르침)인 천도(天道)와 21자 주문(呪文)과 영부(靈符, 부적)를 받았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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