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내 한복판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내엔 '일본육군 조병창'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을 일삼았던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일본군이 중국 침공을 위해 1939년 만들어 조선인 1만여명을 끌어들였던 무기 제조공장. 일제는 조병창에 주물공장을 비롯해 3동의 공장시설을 건립했다. 이곳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감시 속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총·칼·탄환 등을 만들었다. 일제는 한반도 전국 각지와 중국 대륙에서 수탈한 놋그릇·놋수저·징·범종 등 쇠붙이를 용광로에 녹여 무기를 제조했다. 인천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엔 송·원·명대에 제작된 철제 범종 3개가 전시돼 있는데, 일제가 1940년대 태평양전쟁 당시 중국 본토에서 공출해 부평 조병창으로 옮겨 놓았다. 이들 범종은 쇳물로 녹여 무기로 제조될 뻔했지만, 해방 직후 이경성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의 수습 노력으로 보존됐다고 한다.

조병창 노동자 증언에 따르면 일제는 쇠붙이를 녹이거나 목재를 쪄 무기 부품 등을 만들던 '1공장', 이를 제련하는 2공장, 부품을 조립해 완성품을 제조하는 3공장으로 나눠 운영했다. 조선인 생존자들은 “일제 강점기 조병창 철길 주변엔 일본군이 전국에서 수탈해온 갖가지 쇠붙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회고했다. 일본군은 조병창 철길 바로 옆 공장에서 공출품을 녹여 무기를 만들었다. 인천이 항만과 경인철도를 갖추고 있는 점을 최대한 이용했다.

지금 부평공원에 가면, 2017년 8월 세운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볼 수 있다. 일제 치하 부평공원 일대에 건설된 한반도 최대 규모의 병기창인 '조병창'을 중심으로 자행된 인권유린과 노동착취, 그 상황을 딛고 일어서는 해방을 주제로 건립됐다. '인천 평화의 소녀상' 옆에 세운 이 노동자상은 '해방의 예감'이라고도 불린다.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 일제의 만행을 표현했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은 우리에게 과거를 결코 잊지 말자며 서 있는 듯하다.

인천시가 이런 수탈의 현장이었던 조병창 안 '일본군 땅굴' 조사를 다음 달 초 본격적으로 벌이기로 했다. 탐사엔 시와 문화재청, 국방부, 산림청 등이 함께한다. 관계 기관과 모여 조병창 지하 시설물의 체계적 조사 방향과 기관별 역할 등을 논의한다. 시는 아울러 시민의 날(10월15일)에 맞춰 80여년간 '금단의 땅'으로 여겨졌던 캠프마켓을 시민들에게 개방할 예정이다.

조병창은 해방 후 미군기지에 편입됐다. 그리고 민간인 출입이 제한되면서 국민 관심에서 멀어졌다. 미쓰비시 중공업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의 수출 규제로 한일 관계가 몹시 나빠진 가운데, 조병창은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흔적 중 하나다. 이렇게 큰 유적 가치를 띤 조병창에 대해 새롭게 연구하고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책임이 중차대하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