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영모 통일민주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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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고 김대중 대통령 서거 11주년이 되는 해이다. 김 전 대통령은 55년이나 지속된 대립과 분단시대를 가르며 평화와 통일의 물결을 일으켜 남북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려 했다.

이런 김 전 대통령의 6.15남북공동선언 내용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시금석이다.

거인 DJ는 가셨고 그 온기가 점차 잊혀져 가는 지금도 그 뒤를 이어 '평화와 통일의 향기'를 묵묵히 이어가는 분들이 도처에 있다.

통일민주협의회 김태순 수석대표는 1995년 1월 17일 민족의 자주적 의지와 힘으로 통일민주국가를 건설하고 남북 사회 문화적 통합을 기하는 각종 사업을 추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통일민주협의회를 창설했다.

김 대표는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과 6.15공동선언 그리고 이를 실천할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출범에 지대한 역할을 맡아 통일민주협의회를 공동의장단에 오르게 했다. 2000년에는 통일교육지원법에 따른 사단법인 통일교육협의회 창설에 앞장서는 등 평화·통일분야 인사들이 공인하는 1세대 통일지도자다.

김 대표에게는 세간에 화제가 된 소소한 일화들이 많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태순 대표의 만남과 동지 동행의 단초는 의외였고 운명적이었다. 인제에서 군 복무를 하던 중 “김대중 후보가 국회의원으로 나왔으니 살펴보고 상부에 보고하라”는 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먼발치에서 김대중 후보의 연설을 들었다.

연설의 내용이 절절히 옳았고 설득력에 감동되어 상부 보고는커녕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일생을 DJ와 함께 평화와 통일의 길을 걸어왔다.

김 대표는 충남 당진 출신으로 목포 김대중 선생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런데도 당진 사람 김태순은 사재를 털어 DJ와 함께 충청도 전역은 물론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때 들어간 돈을 오늘날로 어림잡아 보면 서울 종로의 집 10채는 넘을 것이라고 농담을 던진다.

그의 열정을 인정한 DJ는 비례대표 국회의원 자리를 제안했지만, “국회의원은 정치를 원하는 사람에게 주라”고 거절하며 한 번도 여의도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덕에 유신시대 때는 중정 체포대상 1호로 오를 만큼 요시찰 인물이었다. 다행히 체포 직전 중정에 근무하던 후배가 정보를 주며 아예 집으로 가지 말라고 해 감옥행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길로 설악산에 들어가 7년이나 풍찬노숙하며 자연인으로 살아갔다. 이 때 성경 숙독과 독서를 통해 민주, 평화, 통일의 삶을 온몸으로 익혔다고 한다.

김 대표는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지난 7월 27일 인천시청에서 개최된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 평화 순례단 출범식에 참석했다.

이어 광화문 한강하구 중립수역 선포식 기자회견, 김포 전류리 포구의 한강 내해 문제 진단, 강화 승천포의 평화 염원 음악회에 비를 맞으며 젊은이들과 끝까지 함께했다.

노환 탓에 허리 디스크 수술도 하지 못할 처지인데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온종일 계속된 강행군을 마다하지 않았다. 김 대표는 '내 소원은 평화와 통일활동을 하다 죽는 것이고, 그것이 내 삶의 가장 큰 행복'이라는 말을 버릇처럼 되뇌이며 살아간다.

후배들이 통일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한다.

내가 후일 86세가 된다면 그때도 DJ나 김 대표처럼 평화와 통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