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연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실험체 중 하나는 예쁜꼬마선충(Caenorhabditis elegans)이라 불리는 동물이다. 1㎜ 크기의 이 작고 귀여운 동물은 세 번의 노벨상 수상에 기여했다. 전체 게놈과 커넥톰이라 불리는 뇌 회로 지도가 완성된 지구에서 유일한 동물이다. 특히 세대 교체에 3~4일 밖에 걸리지 않아 수명과 장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1975년 칼텍의 연구자들은 이 활기찬 동물이 유사시 특이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온, 유해 물질, 기아와 같이 심각한 스트레스에 처하면 '다우어(dauer, 내구성)'라 불리는 휴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이 작은 동물은 섭식, 성장, 번식의 생물학적 과업을 모두 중단하고 오로지 생존에만 몰입한다. 다음 세대를 포기하는 것이다.

20~30대들은 요즘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유행어를 많이 쓴다. 서점가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힐링 에세이들이 상위를 차지하고 있고 매대에는 유사 심리 서적이 수북하다. 삶의 무게에 억눌려 개인적 문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목표를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강남 아파트 한 채, 20억원 이상 자산, SKY 대학 같은 뿌리 없는 성공 조건들이 유령처럼 젊은이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고 있다. 삶과 문화에 대한 다면적 성찰의 흔적은 전혀 없는, 우연과 불로소득에 좌지우지되는 이 지극히 물질적인 목표는 젊은이들을 좌절과 자기 연민에 빠뜨리는 것 밖에는 기능이 없다.

뒤르켐(Emile Durkheim)은 19세기 말 급속한 사회 변화에 개인의 가치 규범이 따라가기 못해 생기는 혼돈 상태를 관찰하고 아노미(anomie)라 불렀다. 세월이 흘러 머튼(Robert King Merton)에 의해 보완된 정의에 따르면, 현 시대의 아노미는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목표와 이를 이루기 위한 사회적 구조나 제도적 수단 간에 괴리가 있을 때 발생한다. 다시 말해 원하는 목표를 정상적인 수단으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을 때 나타난다. 머튼의 아노미에 빠진 인간은 무한한 불만의 늪에 갇히거나 아니면 정신적 휴면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젊은 세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코로나가 앞당긴 4차 산업의 대변혁기이다. 수억 명이 무용계급으로 밀려날 것이라는 선정적 주장을 외면한다 하더라도, 18세기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노동구조 개편이 오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감하고 있다. 전 세계 입안자들은 슬슬 기본소득제도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디언 보호구역의 원주민들처럼 기본소득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하루종일 검색과 클릭으로 GAFA(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 같은 기업의 정보 노동에 종사하는 세계를 상상하면 우울하다.

우리 세대와 우리 아버지의 세대도 삶을 꾸리고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최소한 목표 달성이 가능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었다. 지금의 20~30대들은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사회로부터 지극히 물질적인 가치관을 주입받았으면서, 동시에 그것에 도달할 수 없는 사회적 제도와 구조를 함께 상속받았다. 그들이 '노력'이나 '열정 페이'에 신물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 책임은 온전히 기성 세대에 있다.

젊은 세대가 '다우어'와 같은 휴면 상태에 빠지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기성 세대들은 눈앞의 손익 계산과 세 겨루기의 늪에서 시선을 돌려 젊은 세대들이 상식적인 노력으로 소박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지성인들은 유해한 물질 가치를 무너뜨리고 젊은 세대가 기댈 수 있는 단단한 문화적 가치를 세워야 한다.

현명하게도 젊은 세대들은 기성의 성공 가치를 버리고 스스로 만든 버킷 리스트를 따라가고 있다. 여기서 오히려 희망이 엿보인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조금만 더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된 버킷 리스트는 훌륭한 문화 가치로 변모할 수도 있는 일이다.

 

송준호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