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에서 조기가 다시 잡히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연평도와 조기의 인연은 오래 전에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연평도 바다에서 조기가 사라진지 40여년만인 2012년 미량(0.8t)이 잡혔으나 지난해는 50배 증가한 어획량(47.4t)을 기록했다

연평도는 서해 섬 가운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풍요로운 섬이었다. 군밤타령에 “연평바다에 얼싸 돈 바람 분다”는 구절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평소 빚이 있는 선주들이 연평도에서 조기를 잡아 빚을 갚는다고 해 “연평바다로 돈 실러 가세”라는 뱃노래도 있었다. '돈 바람'의 시발은 다름 아니 조기였다. 그 사연은 연평도에 있는 '조기역사관'에 잘 담겨 있다.

연평도 조기 파시(波市, 바다 위에 서는 시장)는 지난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했다. 연평도 해상에서 조기가 많이 잡히는 4~5월이면 전국에서 수천 척의 어선이 몰려들어 포구에서 인근 당섬까지 배로 걸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배들이 정박하면 물동이를 머리에 인 아낙네들은 허리까지 바닷물에 적시며 급수시설이 없는 어선에 다가가 물을 팔았다. 이들의 행렬로 동네 우물이 마를 정도였다.

파시가 열리면 조기뿐 아니라 어구•쌀•생필품 등을 거래하는 200여개의 상점이 순식간에 생겨 3만여명이 북적거렸다. 조그만 섬에 수십 곳의 술집도 생겨나 색시들이 객고에 지친 선원들을 호객했고, 노랫소리가 밤새 그칠 줄 몰랐다. 집집마다 조기를 엮은 두름이 지천을 이뤄 아이들이 조기 한 마리를 들고 빵집에 가면 찐빵 한 개를 주던 시절이었다. “농촌은 보릿고개지만 연평도에서는 개도 이밥(쌀밥)을 먹는다”, “연평도 주민들은 두달 벌어 1년을 먹고 산다”는 말까지 생길 만큼 풍요로웠다.

하지만 1969년부터 조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조류 변화나, 조기 회유(回游)경로가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주민들은 김 양식, 해파리 잡이 등으로 그런대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꽃게가 국민들의 밥상에서 인기를 끌면서 품질 좋은 연평도 꽃게가 효자로 등장했다. 전에는 주민들이 발에 채어도 거들떠보지 않던 꽃게였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꽃게 어획량이 급감하고 중국어선 불법조업 등으로 꽃게잡이에 고전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기가 다시 잡히는 것은 주민들에게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1950~60년대 풍요를 떠올리는 주민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