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방콕 생활이 늘면서 읽게 된 소설책 하나는 노벨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출신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이다. 한 도시에 갑자기 눈앞이 하얘지는 전염병이 번진다. 당국은 감염자들을 강제로 격리수용하고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는 한 죽어서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다.

감염자 격리병동에서는 눈 뜬 세상에서는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각종 악행이 자행된다. 식욕을 충족하기 위하여 남의 빵을 훔치는 탐욕은 약과이다. 폭력을 사용한 약탈과 강간이 횡행하고 과거 눈 뜬 세상의 도덕과 질서는 무너진다. 남의 시야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니 인간의 악한 심성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세상을 지배하는 해방구가 된다. 실종된 기존의 위계질서의 빈 공간을 폭력조직이 채우면서 이들의 사익이 모든 공공이익에 앞서게 된다.

그러나 폐허 속에서도 새싹이 움트듯이 감염병동의 증오와 아귀다툼 속에서도 사랑과 배려가 살아나며 불의에 저항하는 투쟁의 의지가 점화된다. 동물과 신의 중간 계에 있는 인간이 해탈을 하지 않고서는 원초적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의식이 있는 이상에서는 따뜻한 마음이 비록 약해질지언정 꺼지지는 않는 것이다.

대형화재로 감염병동을 빠져나온 눈먼 자들은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려 눈멀었음을 알게 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먼저 눈먼 자들에서부터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눈멀게 하는 것은 바이러스뿐만이 아니다. 젊은 날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여태껏 원수 같은 배우자랑 함께 사는 남녀가 얼마나 많으랴. 전후 반공과 성장이데올로기에 눈멀어서 독재정권의 인권침해 참상을 외면한 사람이 우꼴뿐이랴. 민주주의의 함성과 평등의 유혹에 넘어가서 사실을 보지 못하고 인민독재를 용인하는 사람이 일부 좌빨뿐이랴. 남의 얘기가 아니고 내 부모, 형제 얘기요 내 얘기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우리는 모두 눈먼 자들이다. 그러나 눈먼 자라고 해서 모두 증오와 아비귀환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눈먼 사람에게도 사랑과 배려의 은총이 내려져 있다. 타인도 나와 같이 이기심과 이타심을 모두 갖고 있는 인간임을 인정한다면 공존의 공동체를 가꾸어 갈수 있다. 자신도 눈먼 자임을 깨닫는 순간이 새 출발의 시작이 될 것이다.

사람의 시각은 너무나 강력한 정보수집의 통로이기에 때로는 다른 감각기관이 있으면서도 시각에만 의존하게 되고, 이성적 사유에 의한 판단을 어렵게 할 수 있다. 눈먼 자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되고, 많은 경우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눈먼 헬렌 켈러는 누구 못지않게 주옥같은 저작을 남겼으며 사회적 차별을 없애는 운동에 앞장섰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며칠간만이라도 눈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경험을 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축복할 것이다. 어둠은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침묵은 소리를 듣는 기쁨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우리는 다소간의 장애 체험을 하고 있다. 이 불편함이 우리를 더 성숙하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웃과 나 자신을 위해서 갑갑해도 마스크 제대로 쓰고 기침예절 지키자. 이참에 다중이용시설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습관도 버리자.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득에 연연해하지 말자. 언제 코로나에 감염될지 모르는데 정부지원금 몇 푼 더 받겠다고, 남이 누리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고 악악대지 말자. 공적지원에 목을 매는 기업이나 개인에게 미래는 없다. 힘들어도 자기 다리로 일어서서 두 팔을 흔들며 걸어야 건강해지듯이 자기 노력으로 성공하도록 분투하자.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자. 한국인은 잡초처럼 끈질긴 민족성을 가졌다고 하지 않는가.

내 밖을 보기에 앞서 내 안을 보고, 남이 가진 것의 부당함을 따지기에 앞서 내가 가진 것에 대해 나는 자격이 있는지를 따지고, 오늘 내가 빈궁해도 남을 도울 수 있다면 이에 감사하자. 한국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우리의 마음가짐이며 모든 것은 여기에 달렸다.

 

정찬모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