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인천박물관 한바퀴] ⑬전원미술관
[다함께 돌자! 인천박물관 한바퀴] ⑬전원미술관
  • 장지혜
  • 승인 2020.08.11 18:06
  • 수정 2020.08.11 21:02
  • 2020.08.12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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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때부터 특출났던 미술실력
가정형편 탓 미대 대신 취업했지만
스크린 판화 디자인 일 맡게 되면서
능력 알아본 일본 재력가 대학 후원

그 후 40여개 상 휩쓸며 이름 알려
40대엔 동경 미술관 스카우트 받아
고향 개인미술관 설립조건 내걸어
국내 1호 생존작가 미술관 탄생
예술인프라 없던 25년 전 강화
공연 유치 등 '문화향유 길잡이'
▲ 전원미술관 내부엔 유광상 화백의 수묵화와 채색·한국·서양화로 가득하다. 120여개 작품은 한 사람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감정과 화체가 다채롭다.

 

 

인천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 한적한 마을에 25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미술관 한 채가 서 있다. 유광상 화백이 자신의 아호를 붙여 1995년 설립한 전원미술관이다. 미술관은 국내 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 해외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유 화백의 작품 120여점으로 채워져 있다. 이 곳은 국내 1호 생존작가 미술관으로도 유명하다. 보통 화가 사후에 미술관이 건립되기 마련인데 47세라는 젊은 유 화백의 나이때 본인 미술관을 세우게 된 사연도 흥미롭다.

 

#일본 후원자가 인재 발탁 조건으로 쾌척

유광상 화백은 지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 강화에서 태어났다. 4남매 중 장남이어서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의 미술 실력은 알아줬다. 선생님들이 그의 재능을 높이 사 미대 진학을 권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고교 재학 시절부터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첫 직장이 한국에 있는 일본 인쇄소였다. 여기서 실크스크린 판화를 디자인 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까까머리 교복 입은 학생의 놀라운 실력을 본 일본 관계자가 그를 일본의 재력가에게 소개해 준다.

유 화백은 주로 먹을 사용했다. 묵직하고 깊이있는 먹을 자유자재로 화폭에 담았던 그의 그림을 일본 재력가가 무척 아꼈고 일본에서 살 공간과 대학 진학까지 후원하게 됐다.

동경 디자인대학에 입학했지만 한국인을 바라보는 차별적 대우를 당했던 그는 보란듯이 입학 3개월 만에 일본인들 조차 하늘에 별따기 였던 공모전에 입상한다. 당시 함께 응모했던 그 학교 교수는 떨어지고 유 화백만 합격한 상황이었다. 이때 작품이 비마(飛馬)였다. 수풀이 우거진 나무 사이를 하얀 백마들이 줄지어 달려가는 모습을 담았다.

이후 일본에서 알아주는 화가가 된 그는 40여개의 상을 휩쓸었다.

그가 40대가 되었을때 동경의 한 미술관에서 그를 스카우트 하고 싶어했다. 거기서 그림을 그리는 조건으로 유 화백은 그의 고향 강화에 개인 미술관 설립을 요청했다. 지금의 전원미술관이 탄생한 것이다.

 

 

#지역의 문화예술 교육 기관으로 우뚝

전원미술관에는 유 화백의 수묵화와 채색화, 한국화와 서양화가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

2002년 월드컵 한국 축구 국가대표들과 일본 스모 선수들의 인물화도 그의 손을 거쳐 볼 수 있으며 한 벽에 다 걸리지 않는 대작들도 있다.

전원미술관은 단순히 개인 미술관의 기능에 그치지 않았다. 25년 전 특히 문화예술 인프라가 거의 없던 강화지역에 예술을 알리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역할을 도맡았다.

그림을 전시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현대 미술을 선보이고 소개했다. 뿐만 아니라 음악회와 사물놀이 밴드 공연 등도 유치해 각종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줬다.

유 화백의 아내는 지점토 만들기와 풍선아트, 염색 체험 등 교육 강좌를 개설하고 강화지역 문화전도사를 자처했다.

 

#유광상 화백·전원미술관 관장

▲ 유광상 화백·전원미술관 관장.
▲ 유광상 화백·전원미술관 관장.

 

꼬마 때부터 낙서를 좋아했던 그가 붓을 든 지도 50년이 다 되어 간다.

전원미술관에 걸린 유광상(사진) 관장의 작품들을 보면 얼핏 동일인의 그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과 화체가 다양하다.

일본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그는 이후 중국, 미국 등을 넘나들며 한국의 그림을 알렸을 뿐더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캔버스에서 나의 붓은 변화무쌍해요. 붓으로는 국경도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역사와 정서의 흐름 역시 자유롭게 표현 할 수 있죠.”

최근 그가 추구하는 기법은 군더더기 없는 '최소화'이다. 넓은 시야로 바라본 세상을 간략하게 축소된 방식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특히 강화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은 유 화백에게 더할 나위 없이 영감을 주는 소재다.

지난해에는 강화문화자연전을 통해 선사시대부터 지금의 풍물시장까지 강화의 모습을 전통수묵화와 채색화, 현대 수묵화로 그렸다.

“이제는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작업을 하려 합니다. 연대별로 기록될 예술의 흐름을 보여 주기 위한 작품을 구상 중입니다.”

그는 코로나19로 오랜 기간 문을 닫았던 전원미술관에서 최근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는 아직도 꿈을 꿉니다. 현대미술의 최고로 꼽히는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고 한국의, 강화의 미술을 알리는 꿈을요. 젊은이들에게도 세계 무대의 문을 두드리라고 말하고 싶어요. 국내와 인천만이 전부는 아니고 해외에서 예술을 교류했을 때 더 많은 기회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갖고 도전하세요.”

/글·사진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공동기획 인천일보·인천광역시박물관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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