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대상, 책이라는 사물을 인간의 오관의 감각으로 지각한 후 의식작용을 통해 인식화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감각기관과 세계의 육체 즉 사물과의 제대로 된 대면을 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공부를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집중력 저하이다. 그런데 필자도 지난 며칠 전부터 5개월 만에 다시 시작한 자유수영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바로 근육의 피로가 엄습해 책상에 앉기조차 힘들어 뇌에서 의식과 인식작용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누워라, 쉬어라, 놀아라 등 악마의 요구만이 난무한다. 설상가상으로 레닌, 철학, 알튀세르, 이데올로기, 혁명, 정치학 용어가 머릿속을 마구 교란하니 더욱 집중하기가 어렵다. 철학이란 개념으로서의 사유 작용인데 철학적 기초가 허약할수록 그 내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나 정치철학은 정치학을 철학으로 해석해야 하기에 그 어려움이 더욱 만만치 않다. 내용이 어려우니 더욱 공부가 싫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갖가지 유혹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책을 펴 앉자마자 귀가 가렵고, 목이 마르고, 눈은 따끔거리고, 뭐가 웅웅대고, 스마트폰 문자나 알림 문자로 손이 근질거려 어느새 페이스북과 카카오톡을 들여다보고 그래도 참고 하려면 동거인이 말 시키고, 저쪽 방 텔레비전 소리가 왕왕대고, 지나가는 행인이 탁하고 가래침 뱉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나마도 간신히 내용 좀 파악해서 순풍에 돛 단 듯 미끄러져 가는 찰나 휙 하고 뒤집혀 버린다. 자괴감으로 다시 책을 들여다볼라 치면 갈 길은 멀고 내용은 아득하니 눈앞이 어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매진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래도 한번 잡았으니 끝까지 해보자 하는 일념 하나뿐이다.

세 번째 이유는 목표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하기 때문이다. 하루 혹은 일주일 정도의 분량을 정해 놓고 꾸준히 실행하다 보면 어느덧 실력이 쌓여 자신감을 획득하게 된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꾸준하고 성실하게 공부를 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으리라. “인간은 여러 개의 사물 속에 섞여 있는 또 다른 사물이 아니다. 사물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기 때문”이라는 빅터 프랭클 박사('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는 '자기 결정론'으로 이를 매우 잘 설명한다.

그런데 우리 선조 중에 시인이자 문장가였던 백곡 김득신(金得臣, 1604 ~ 1684)이라는 분이 계신다. 그는 몇 시간 전 공부한 것을 다 까먹는 등 공부한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해 공부가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김치는 김득신에게 공부를 멈추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고 김득신은 밥을 먹을 때도, 보행할 때도 계속 책을 놓지 않아 <백이전>을 11만3000여번이나 읽고 다른 책들은 2만여번 읽는 등 엄청난 노력으로 마침내 59세의 나이로 성균관에 합격했다.

공부를 못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태어남에 명석함의 문제가 아닌,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대는 것이 바로 공부를 못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이유를 버리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 그 이룸은 세속적인 성공일 수도 있고 지식에 대한 앎의 기쁨일 수도 있다. 그러니 오늘도 부지런히 공부하자. 다행히 우리는 11만번까지는 읽지 않아도 좋을 만큼 좋은 머리를 가졌으니 말이다.

 

사유진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