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30.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조인환(하)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30.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조인환(하)
  • 인천일보
  • 승인 2020.08.09 16:19
  • 수정 2020.08.11 14:41
  • 2020.08.1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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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편치 못했던 삶, 넋은 편히 지내고 있을까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충청도서 거의
경기도 양근 거쳐 9월 양주·파주로 이동
일본군과의 격전서 대담한 전술 펼치기도
당시 황성신문 '창괴하던 양한'이라며 비하
의병 우호적이던 대한매일신보도 '괴수'로 보도
1909년 12월20일 이천서 부하의 총탄에 사망
일제, 이듬해 1월27일 묘 파헤쳐 시신 검안 만행
정부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에도 대우 못 받아
▲ 조인환·권화경 의진이 1907년 8월3일 지평의병 4, 5백 명과 합세하여 서울로 향한다고 지평군수가 내부대신에게 보고하고, 이튿날 양근 우편취급소 일본인들이 가족을 데리고 피신했다는 기사(대한매일신보. 1907. 08. 09.).
▲ 조인환·권화경 의진이 1907년 8월3일 지평의병 4, 5백 명과 합세하여 서울로 향한다고 지평군수가 내부대신에게 보고하고, 이튿날 양근 우편취급소 일본인들이 가족을 데리고 피신했다는 기사(대한매일신보. 1907. 08. 09.).
▲ 조인환·김득수 의병장이 양근군 갈산동에서 활약한 기사. 황성신문은 의병장을 '의병괴수'라고 하고, 두 의병장을 '양한(兩漢두 놈·두 무뢰배)'라고 했다(황성신문. 1907. 08. 27.).
▲ 조인환·김득수 의병장이 양근군 갈산동에서 활약한 기사. 황성신문은 의병장을 '의병괴수'라고 하고, 두 의병장을 '양한(兩漢두 놈·두 무뢰배)'라고 했다(황성신문. 1907. 08. 27.).

 

 

◆ <독립운동사> '경기의병 각지 활약' 편에 첫 번째로 등장

1970년 12월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독립운동사> 제1권을 간행했는데, 조인환 의진은 이 책 속의 '제4절 경기의병의 각지 활약'에 맨 먼저 등장하고 있다.

 

“1 조인환 의병부대

군대해산 후 충청도에서 기의한 조인환은 의병을 거느리고 1907년 8월 하순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이동하여 일군 아카시(明石) 중대와 격전을 벌인 후 9월 상순 양주·파주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의병 부대원 약 4백 명은 소수단위(10여 명씩)의 게릴라부대를 편성하여 각지로 출몰하면서 싸우는 한편, 각 면·동에 통문을 발하여,

“전답곡(田畓穀) 추수자(秋收者)를 병작분반(倂作分半)하여 작인 소식(所食) 이외에 전주소식(田主所食)은 수일립곡(雖一粒穀)이라고 물계급(勿計給)하고 선복수출(船卜輸出)을 일병집류(一倂執留)이되 여혹위월(如或違越)이면 해작인(該作人)은 포살하고 해동(該洞)도 충탕(衝蕩)케 한다.”

라고, 하여 군량확보에 주력하면서 친일관료들을 소탕하고 이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1권. 559쪽)

조인환 의병장은 1907년 8월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서 그달 하순 경기도 양근(현 양평 속면)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아카시(明石) 대위가 이끄는 부대와 격전을 벌인 후 9월 상순 양주·파주 지역으로 이동한 후 각지에 통문을 내었는데, 추수를 한 곡식은 경작자 몫을 제외하고, 토지소유자 몫은 모두 의병들의 군량미로 사용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일본군 제13사단장은 보병 제52연대의 1중대를 파주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9월8일 새벽 일본군의 기습에 의병은 격전을 벌여 이들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으나 16명의 전사자를 내고 말았다.

“8월 하순 양근 부근에서 아카시(明石) 중대에 의하여 소탕된 수괴(首魁:의병장 -필자 주) 조인환이 인솔하는 폭도(의병-필자 주)는 9월 상순 경기도 양주 및 파주 부근으로 이동하여 약탈 횡포를 극하여 경원(京元)·경의(京義) 가도 부근에 적세가 만만치 않았다. 그로 인하여 제13사단장은 보병 제51연대 중대장 타나베(田邊) 대위에게 제1중대 및 제10중대의 반소대, 임시 산포 1소대, 공병 1분대를 주어 양주 부근을 또 보병 제52연대 제12중대에게는 파주 부근을 토벌시켰다.(중략)

8일 타나베 토벌대는 폭도를 수색하면서 가라비리(加羅非里:현 광적면 가납리-필자 주)로 향하여 전진하던 중, 동지 서북방 석적리(石積里) 방면으로부터 보통 한인으로 분장한 남녀가 삼삼오오로 계속 아군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자들을 만났으나 그 대부분을 통과시킨 후 비로소 위장한 폭도라는 것을 간파하여 곧 총포탄의 사격을 가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권. 699~700쪽)

일본군은 보병과 산포대, 공병대까지 동원하여 공격해 오는 상황 속에서도 조인환 의병장은 얼마나 대담한 전술로 일본군과 싸웠는가를 그들의 보고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 의병들의 피로 물든 산하

그 후 조인환 의진은 다른 의진과 긴밀한 연계를 하며 임진강 일대를 근거로 일본군을 기습하여 그들에게 다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의병들의 피해는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음을 주차한국 일본군사령관이 일본군 참모총장에게 보고한 문서인 '한국폭도사건 피아(彼我) 손해 일람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표 참조>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7월14일까지 1년 동안 일본군경에 의해 피살 순국한 의병이 1만2000명에 가까웠으니, 삼천리금수강산이 그야말로 피로 물든 산하가 되었던 것이다.

▲ 현충사(독립관) 순국선열 위패 봉안소.
▲ 현충사(독립관) 순국선열 위패 봉안소.

 

▲ 조인환 의병장이 1909년 12월20일 피살되었다는 문서(<폭도에 관한 편책>(1910. 01. 26.).
▲ 조인환 의병장이 1909년 12월20일 피살되었다는 문서(<폭도에 관한 편책>(1910. 01. 26.).

 

◆ 조인환 의병장에 대한 공훈록과 신문기사

 

“경기도 양평 출신이다.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구한국군이 강제 해산되기에 이르자 이러한 일제의 내정간섭에 대항하여 일제를 몰아내고자 의병을 규합하여 8월 4일 경기도 양근(楊根:지금의 양평)을 습격하여 군아·세무서·우편물취급소 및 일본인 가옥 등을 파괴·방화하였다. 이에 놀란 일인 우편물취급소 소장은 가족을 동반하고 도망 다녔다. 이 양근 습격 사건으로 일군에게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파주(坡州)·양주(楊州)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임진강 일대를 근거로 수차 일병을 습격하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권. 929쪽)

1907년 7월19일 광무황제가 퇴위당하고 5일 뒤 24일 한일신협약(통칭 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일본 경찰이 경찰권을 휘두르게 되었지만, 일본으로부터 경찰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던 까닭에 당시 의병투쟁에 관한 우리 기록은 의병장 문집이나 신문기사를 통하여 볼 수 있고,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전후에 우리 땅에 들어온 일본군의 기록인 '한국 폭도봉기의 건'에 나타나 있다.

당시 비교적 의병에 대하여 호의적이던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에 의병장을 '의병 괴수'라고 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황성신문(1907. 08. 27.)은 조인환·권득수 의병장을 '의병괴수', 두 의병장을 '양한(兩漢:두 놈·두 무뢰배)'라고 했고, 이어 조인환·유각 의병장을 '倀魁하던 兩漢'이라고 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범을 인도한다는 나쁜 귀신인 창괴(倀鬼)의 우두머리[魁] 두 놈·두 무뢰한'이라고 했으니, 엄청난 비하였다.

1896년 전기의병 때는 어찌했을까? 당시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서재필 귀화명)이 주도했던 독립신문에서 의병을 “비도”, 의병장을 “비도괴수”라고 했는데, 이 낱말의 뜻을 풀어보면, 비도(匪徒)는 '떼를 지어 다니며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무리'이고, 괴수(魁首)는 '악당의 우두머리'이니, '국수보복(國讐報復·나라의 원수를 갚자)'의 기치를 들었던 의병을 보는 시각이 배달겨레와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조인환·유각 의병장을 ' 魁하던 兩漢'이라고 비하한 황성신문(1907. 10. 11.)
▲ 조인환·유각 의병장을 '倀魁하던 兩漢'이라고 비하한 황성신문(1907. 10. 11.)

 

◆ 조인환 의병장의 피살과 일제의 만행

조인환 의병장은 군대해산 직후 충북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원주를 거쳐 양주, 파주, 적성 등지에서 가장 많은 의병으로 구성된 의진을 이끌고 일본군경과 싸웠다. 조인환 의진에서 활약하다 살상된 의병도 부지기수지만 붙잡혀 재판을 받은 경우도 많았다.

조인환 의진에서 활동한 전성환은 농상소 감관(農商所 監官) 출신으로 전 협판 엄주익(嚴柱益)을 찾아가 군자금 10만 냥을 요구하다 피체되었고, 나응완은 장인(匠人)으로 전성환과 함께 활동하다 피체되어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 관할권이 일제에 넘어가기 전이라 전성환은 유배 10년, 나응완은 유배 7년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조인환 의병장은 불행하게도 의진의 내분으로 인해 피살되었다는 기록이다.

“여주경찰서장 보고에 의하면 폭도수괴(의병장-필자 주) 조인환은 이천군 발면(鉢面) 파찰송리(杷察松里)에서 그 부하 7명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신문이 있어 즉시 순경을 파견하여 조사케 한 바 동지 촌민들의 말에 의하면 전년(1909년-필자 주) 12월 20日 오전 8시경 약탈품 분배를 놓고 부하와 다툰 끝에 총살되었다고 하며, 그 시체를 매장한 부근에서 조선도 한 자루를 발견한 바 이는 그가 상시 휴대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권. 16쪽)

“본월 2일 '고비수 제740호의 1'로써 폭도수괴 조인환 살해사건에 관하여 취조하라는 조회에 의하여 조사한 바, (중략) 확실을 기하기 위하여 1월 27일 순사감독 하라유타(原由武八) 외 1명은 조인환의 면모를 알고 있는 순사 이상준(李相駿)과 같이 현장에 출장 시체를 발굴, 이를 검(檢) 시킨 바, 전연 조인환에 상유(相遺) 없음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앞의 책. 174~175쪽)

일제는 그가 실제로 사망했는지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검안했다는 데서 분노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일제의 문서에 피살된 장소로 나와 있는 '이천군 발면(鉢面) 파찰송리(杷察松里)' 라는 장소를 살펴보니, 1914년 부면(夫面)과 발면을 합쳐 부발면으로 되었고, 1989년 부발읍으로 되었으나 파찰송리는 알 길이 없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그의 무덤은 서울·대전현충원에 없다. 그리고 서울현충원 무후선열의 위패를 봉안한 충렬대나 순국선열유족회가 마련한 순국선열 위패 봉안소인 현충사(독립관)에서도 그의 위패를 볼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 이태룡 박사 <br>​​​​​​​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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