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프·미 군함에 두 번 양요 패배
일본 운요호 사건 일으켜 도발
1883년 제물포 강제 개항 수모
바닷가 사람들, 최하층 계급 굴레
먹고 살기 바빠 … '개항' 별 의미없어
고위층·전통 유림엔 큰 충격
유교적 도덕 국가 해체 염려
상투 풀고 반대했지만 못 막아
1884년 김정구·강기환·김기두
해운업 꿈꾸며 수선상회사 설립
일본인 기선 판매 사기에 속아
모금액 12만냥 날리고 회사 파산
포구에 서린 곡절과 사연을 가슴에 묻어 둔 채, 냄새나는 개펄 바닥, 제물포 포구는 1883년 마침내 문을 연다. 제물포에 앞서 부산항과 원산항이 개항을 하기는 했어도, 이제 '도성(都城)의 인후지지(咽喉之地)' 제물포가 빗장을 풀음으로써 비로소 조선은 완전히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이로부터 '인천 개항'이라는 어휘가 인천 역사, 한국 역사의 갈피에 적히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항구라는 이름을 얻은 제물포항은 과연 이곳 주민들에게 어떤 모습,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곡절 끝에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일이긴 했으나 5백년 쇄국을 일시에 걷어치운 개항이라는 사건이 이들에게 충격이었을까.
단정할 수는 없어도 제물포의 일반 서민들에게는 별다른 의미도 충격도 아니었던 듯하다. 대대로 최하층 계급 굴레를 쓴 바닷가 사람들, 돛배 하나로 그날그날 숭어를 잡고, 민어를 잡고, 조개를 건져 올리는 것이 전부였던 바닷가 서민들은, 개항이라는 어휘 자체를 굳이 구별하여 의식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서민들에게는 이러했지만, 식자층, 즉 벼슬자리에 있던 높은 신분의 사람들과 전통의 유림(儒林)들에게 개항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처음 그들은 상투를 풀을 정도로 반대했는데, 이유는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 자기들이 몸담고 있는 유교적 도덕 국가의 해체를 염려해서였다. 그러나 기울어 가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907년 5월의 25일자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 제11호에 그러한 그들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한 논설이 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와 개항장 등지에서 음란한 풍속이 극성을 부려 부자나 서민 모두가 탕자처럼 가무와 주색에 빠져들고, 이로 인해 누만금(累萬金) 재산을 일거에 탕진함은 물론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육신마저 병들어 죽게 한다며 나라에서 속히 문치(文治)로써 쇄신할 것을 주장했다. 이 글은 제물포 개항 이후 25년이 지난 시점에 나왔지만 그동안 참고 참았던 그들의 심화(心火)를 토로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다시 말머리를 돌리자. 가장 단순하게 말해 개항은 항구 바깥의 배가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동시에 항구 안쪽의 배 역시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자유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밖으로 나갈 배가 없었다. 그러니까 제물포 개항은 반쪽짜리, 빈껍데기 억지 개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물포 항구 바깥쪽에 있던 외국 배들은 이미 19세기 중후반 무렵이던 1866년과 1871년, 그리고 1875년에 잇달아 항구 안으로 들이닥쳤다. 수교(개항)를 요구하면서, 저들의 함선은 벌써 수교 본래의 의미를 파괴했던 것이다. 그 배들은 총포(銃砲)로 무장한 군함들이었다.
이렇게 불란서와 미국의 무력에 의한 두 차례의 양요(洋擾)에 이어 일본 군함까지 차례로 들어왔다. 그러나 제물포 항구 안쪽에는 군함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속수무책이었다. 앞선 두 번의 전쟁에서의 패배는 호시탐탐하던 일본의 침공을 부추기는 꼴이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제물포 강제 개항으로 이어졌다.
조선 정부는 제물포 개항 이후에야 비로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개항장 인천항을 중심으로 바다를 지킬 군함과 함께 물자의 수송과 승객 운송을 위한 선박의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깨닫기는 했어도 현실에 무지했던 조선 정부는 허둥지둥했다. 좀 뒤의 일이지만 조선 정부는 고철이나 다름없는 다 낡은 배를 군함으로 구입했고, 앞뒤 없이 상용(商用) 배를 사들였다가 결국 외국상인에게 운영을 맡기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몽매(蒙昧)를 드러내는 일화가 있다. '한 조선인이 간교한 일본인의 사기극에 넘어가 제물포-일본 간의 해운 항로 개설의 꿈을 접어야 했다'는 내용이다. 구한말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의사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의 기록에 나온다.
이 이야기는 10년 전 본보에 짧게 소개한 바 있다. 그때 알렌이 이 글을 쓰며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궁금했었다. '남을 잘 믿는 천성과 지나치게 낙관적이면서, 남이 귀담아 듣지도 않는 말을 털어놓기 좋아하는' 조선 사람들에 대해 적으면서 그가 혼자 쓴웃음을 지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제물포 개항 바로 직후였다. 알렌이 자기 친구라고만 지칭한 한 사람이 해운업을 위해 동지들을 모아 12만 냥을 모금한다. 그는 곧 일본 나가사키로 가서 “매우 예의바르고 친절한 일본인”을 만난다. 그리고는 그 일본인의 간교에 빠져 당시 나가사키에 입항해 있던 엉뚱한 영국 배를 구입하는 조건으로 그에게 모금한 거금을 몽땅 떼어 먹힌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말인데, 알렌의 말에 의하면 그 일본인은 당시 국제적으로 이름난 사기꾼이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건은 알렌이 말한 내용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국사관논총(國史館論叢)』의 한 논문에도 나온다.
'경강구선계(京江舊船契)'의 후예들은 1883년 8월 기선을 구매하여 상업 활동을 하기 위해 자본을 모으고 사공을 모집하여 통리아문의 허가를 요청하였다. 이후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1884년 2월 한성의 김정구(金鼎九)·강기환(姜基桓)·김기두(金箕斗)가 수선상회사(輪船商會社)를 설립하고 일상 오천가태랑(奧川嘉太郞)에게서 기선을 구매하기로 한 사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천(奧川)이 사망하여 기선은 물론 선금 12,000냥도 받지 못하고 회사가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제물포와 일본을 잇는 해운 항로 첫 개설의 꿈을 가졌었다는, 곧 제물포항으로부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배를 스스로 마련하려고 했던 그 선각적 의지만은 가상했다 해도, 거금 12만 냥을 고스란히 날린 무지몽매에는 그만 기가 차고 만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제물포 포구의 부락민들은 개항이라는, 냄새 나는 삭막한 개펄로부터 이름도 낯선 국제항구로 탈바꿈한, 창망한 제물포 바닷물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바뀌었음을 직감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구(未久)에 겪어야 할 자신들의 삶과 그 터전의 변화를 상상이라도 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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