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개펄만 펼쳐져 있던 '제물포 포구'
도서 내항과 월미도 외항 … 천혜 항구 조건
한성 올라가는 최단거리 지리적 이점도
일본에 의해 1883년 강압적인 개항
한국 침략 전초기지로 이용 아픈 역사로
8개 내항부두·송도신항·소래포구 등 발전
인천항, 137년 뒤 국내 최대 국제항 변모
항구! 항구라 하면 무릇 파이프를 문 마도로스와 함께 붉은 색칠을 한 커다란 연통과 멋들어진 마스트를 가진 기선을 떠올리고, 안개 짙은 밤 항구의 불빛과 수부(水夫)들을 상대로 하룻저녁 술을 파는 바와 거기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여인들의 교태 지은 웃음소리! 이런 이국풍정 어린 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릴지 모른다.
부웅- 길게 고동을 울리고는 배는 물길을 가르고 나아가고, 뭍에는 수평선을 향해 멀어져가는 무정한 배를 향해 망연히 서서 젖은 손수건을 흔드는 한 여인, 그리고 푸른 물 위로 무심한 듯 흰 날개를 펴는 갈매기들! 또 혹시 이 같은 장면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나 볼 듯한 이런 장면들을 흔히 이르는 대로 항구의 낭만이요, 애수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항구는 배가 닿고 떠나는 곳이니 몸 가득 낭만을 묻혀 들어온 사람, 머문 사람이 있다면, 마음에 애수를 품고 떠나간 사람 또한 무수히 많았었을 터이니….
그러나 오늘 137년, 우리 인천 항구에 어찌 이 같은 영화 속 사연만 있었으랴. 거기에는 필경 가슴 저미는 비애와 고뇌와 암울과 질곡과 함께 환희와 낭만과 희망과 포부가 점철된 구구절절한 역사와 사연이 있었음에랴.
오늘도 배는 들고나고, 갈매기는 옛날과 같이 물결 위를 난다. 그렇다. 이제 돌이켜 이 항구를 떠나간 사람, 남아 있던 사람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한숨소리, 울음소리―그 이끼 묻은 영욕의 삶의 목소리들을 들어 보자. 이 항구를 훑고 간 오랜 날들 그 풍상(風霜)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함께 웃고, 울어 보는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그에 앞서 우리 고향 제물포 포구의, 인천항의 옛 모습부터 잠시 살펴보자.
작은 굴곡이 많은 원형 해안선가 썰물 때는 넓은 개펄에 드러나는 보잘 것 없는 개흙 땅이 반도를 둘러싸고 있었다. 월미도를 향한 남쪽 해안선만이 비교적 길고 굴국이 심하지 않아서 제물포라는 어촌 포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먼 바다에는 영종.용유.무의.자월.영흥.대부 등 여러 도서로 둘러싸인 외항 그리고 앞바다에는 월미도.소월미도.사도(沙島) 등이 가지런히 내항을 이루고 있어 항구로서는 비교적 적합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기록적인 간만(干滿)의 차이(10.2m)로 수심의 변동이 대단했으나 외항에는 대형 함선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가 있고 내항에도 월미도 앞에는 소형 선박이 닻을 내릴 수가 있었다.
제물포는 이러한 항구 조건과 한성(漢城)으로 올라가는 최단 거리에 있는 항구라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다년간 노려오던 한국 침략의 전초기지로서 인천의 개항을 강행하게 된 것이다.
인용문은 신태범(愼兌範, 1912~2001) 박사의 『개항 후의 인천 풍경』 중의 일절이다. 신 박사는 우리 인천의 옛 원로 의사이시며, 일제 강점기 인천의 역사와 그 현장의 기록을 두 권의 저서로 남기신 분이다. 신 박사의 이 구절이 137년 전, 아직 제물포항, 혹은 인천항이라고 불리기 전의 한 어촌에 불과했던 제물포의 옛 풍경을 떠올려 준다. 자연적으로 항구의 조건은 갖추었다 해도 인총(人叢)도 없이 그저 삭막하게 넓은 개펄만 펼쳐져 있던 곳이 바로 제물포 포구였다.
물론 이 포구가 오늘날 우리나라 최대 항구의 하나가 된 심상하지 않은 내력은 이 글 마지막 문장에 축약되어 있다. 곧 1883년 일제에 의한 강제 개항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강조해 새삼 조선 말기, 인천 개항의 사나운 역사를 여기에 다시 옮기려는 뜻은 아니다. 오로지 인천항의 역사는 일제의 이해(利害)에 따라 강압적으로 비롯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말해 두려는 것뿐이다.
한 구절만 더 읽어 보자. 이 역시 제물포에 대해 '해안을 따라 냄새 나고 끈적거리는 삭막한 개펄'뿐이라고 쓴 글이다.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던 1888년 3월 어느 날 나는 제물포 항구에 내렸다. 나지막한 언덕의 헐벗고 뾰족한 능선을 배경으로 펼쳐진 돌투성이의 해안으로 나는 눈길을 돌렸다. 단조로움을 깰 나무 한 그루 없고 겨우 위안이 될 만한 것이라곤 군데군데 하얗게 덮인 눈뿐이었다. 모래밭 대신에 냄새 나고 끈적거리는 삭막한 개펄이 해안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곳에는 선창이 없어 찬물때라도 배를 바로 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쪽배를 타고 해안으로 다가갔다. 그때 험상궂고 야릇하게 생긴 남자들이 이상한 말로 소리치면서 우리를 조사하려고 언덕에서 급히 내려왔다.
선교사 언더우드 박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1851~1921) 여사의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1888년 제물포에 첫 발을 디딘 언더우드 여사의 눈에도 '선창이 없어 찬물때에도 배를 바로 댈 수가 없는' 제물포 포구의 코를 찌르는 냄새와 함께 길게 펼쳐진 개펄만이 그의 푸른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이것이 동방의 은자, 코리아의 고요했던 한 포구, 제물포 포구가 비로소 베일을 벗고 숫된 자신의 속 모습을 드러내던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한 세기와 삼십 년을 훨씬 넘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제물포 포구는, 인천항은 수만 톤의 거대 거선(巨船)들이 접안할 수 있는 8개의 내항부두와 객선부두, 송도신항과 거기에 더하여 도시 안에 북성포구, 만석부두, 화수부두와 그리고 멀리 소래포구를 둔 우리나라 최대의 국제항으로 변모한 것이다.
해서 이제 우리는 발걸음을 그리로 돌린다. 이곳 제물포에 마도로스의 내뿜는 담배 연기와 시끄러운 웃음소리와 또 가슴속 깊이 정한(情恨)을 묻으며 이별을 고하던 연인의 이야기는 물론 인천항 언저리 뭇사람들의 비애와 고뇌와 암울과 질곡과, 또한 환희와 낭만과 희망과 포부의 삶을 찾아 떠난다.
/김윤식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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