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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조선, 실학을 독하다] 10.야뇌(野餒) 백동수(白東脩) 1743-1816) (2)<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호미나 고무래도 병기가 된다
[아! 조선, 실학을 독하다] 10.야뇌(野餒) 백동수(白東脩) 1743-1816) (2)<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호미나 고무래도 병기가 된다
  • 인천일보
  • 승인 2020.07.13 18:46
  • 수정 2020.07.31 09:33
  • 2020.07.14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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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전투기술 직접 시연 후 그림으로 담아
▲ 선생은 큰 키에 건장한 체격과 수염이 무성하였다고 한다. 선생이 많은 화가와 사귀었고 자신도 그림에 재능이 있었으나 초상화는 볼 수 없다. 다만 <무예도보통지>에 마상월도와 격구를 연무하는 장년의 무사가 보인다. 선생이 직접 시연하였고 나이 등으로 미루어 혹 말 위에서 월도(月刀)를 휘두르는 저 장수가 선생이 아닐까한다.

선생은 무인이었고 서얼이었지만 재주가 뛰어났다. 하지만 운명과 시대가 어깃장을 놓았다. 저 조선에서 선생의 재주는 개발에 편자였다. 그래 선생은 그 성격상으로 “내 일개 서얼 무인이지만 당신들 안 부럽소!”하고 오만하게 손사래 치면 되었다. 어디라 할 곳 없이 고얀히 뿔난 소 뜸베질하듯, “젠장맞을!” 욕이나 이리저리 해대며 낮술이라도 한잔하고 모과나무 심사로 주정이나 부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 주위에는 연암 박지원·이덕무·박제가 같은 좋은 글벗들이 있었다. 선생이 중년에서야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무(武)로 문(文)을 일궜다”는 평가를 받게 된 이유였다.

선생은 ‘검선’(劍仙)이라 불리던 김체건(金體乾)의 아들 광택(光澤)에게 조선 검법을 전수받았다. 김체건은 목숨을 걸고 왜관(倭館)에 숨어들어 검술을 익힌 전설의 검객이다. 이 왜검 검술이 겨루기 중심의 피검(皮劍)이다. 김체건이 이 피검을 숙종 앞에서 시연하였는데, 재를 뿌리고 움직이면서도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광택은 영조가 세자시절 호위무사를 지냈으며 씨름판 최후의 승자인 판막이로 검술의 명인이었다. 광택이 ‘만지낙화세(滿池落花勢, 온 땅에 꽃잎이 후드득 떨어지는 형세)’를 취하면 몸이 감추어져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부자의 검술 세계를 적바림한 유본학(柳本學, 1770~1842?)의 ‘김광택전(金光澤傳)’에 보이는 내용이다.

광택을 선생으로 섬긴 야뇌는 도가적 전통 단학으로 내공을 쌓고 만약의 부상에 대비해 의술까지 익혔다. 선생은 청소년기를 이렇듯 무협의 세계에서 보냈다. 조선 최고의 검보(劍譜)인 <무예도보통지>는 여기서 탄생된 것이다. 연암은 이런 선생을 “영숙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쓰고 전장(典章)과 제도(制度)도 잘 알며,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고 묘사하였다.

선생은 본래 집이 부유했으나 어려운 사람들만 보면 나눠주느라 곤궁한 생활을 했다.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마치고 조선 최고의 무예보(武藝譜)인 <무예도보통지>를 살펴본다. 무예도보통지란 무예 이십사반을 그림으로 풀어 설명한 책이다. 도(圖)는 그림, 보(譜)는 가상으로 상대와 겨루는 것을 상정하여 공격과 방어를 정립한 틀, 통지(通志)는 무예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뜻이다.

18세기, 정조는 무예를 진흥시키고자 하였다. 그 생각의 일단이 바로 <무예도보통지>였다. 책임은 이덕무·박제가·백동수였다. <무예도보통지>는 고금 서적을 바탕으로 편집하였다. 그러나 오늘 관점에서 쓰임을 주안점으로 두었기에 실학을 통한 부국강병까지 아우르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덕무가 쓴 ‘무예도보통지부진설(武藝圖譜通志附進說)’에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자는 것이 좀 불편하지만, 이용후생 등 실학적 사고가 잘 드러나 있다.

“대저 병기란 마지못할 때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그것으로 포악을 금하고 어지러움을 제지하는 뜻으로 사용하였으니, 애당초 이용후생 목적과 서로 겉과 속이 됩니다. 그러므로 봄 사냥과 가을 사냥은 그 말을 사열이요, 향음주례는 활쏘기를 연습이며, 투호 놀이와 축국 놀이에 이르기까지 은미한 뜻이 그 사이에 존재하지 않은 게 없으니, 이 책을 지음이 어찌 특별히 병가(兵家)만을 위하였을 뿐이겠습니까?

미루어 넓히면 무릇 농작물을 가꾸는 밭, 피륙을 짜는 일, 궁궐, 배와 수레, 교량, 성루, 목축, 도기와 주물을 만드는 일, 관복, 세숫대야나 목욕탕의 기물 등 민생이 일용하는 기구들입니다. 일은 반만 하고도 공은 배나 되는 것들입니다. 장차 그 혼미함을 열어주고 그 풍속을 잘 인도하기를 꾀하려면 주나라 성왕이 조정 관리들에게 훈계한 말을 기록한 <주관>(周官)을 잘 계승하고 중국의 옛 제도를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실용 있는 정책을 강론하고, 백성들은 실용 있는 직업을 지키고, 학자들은 실용 있는 책을 찬집하고, 졸병들은 실용 있는 기예를 익히고, 장사꾼은 실용 있는 화물을 교통하며, 공장이들은 실용 있는 기구를 만든다면, 어찌 나라를 지키는 데 대하여 염려하며 어찌 백성을 보호하는 데 대한 걱정이 있겠습니까?” (<청장관전서> 권24)

<무예도보통지>는 실제 무예와 전투 기술은 선생과 병술을 잘 아는 장용영 장교들이 함께 시연(試演)하였다. 1790년 완간되었으며 4권 4책이다. 일명 <무예통지>·<무예도보>·<무예보>라고도 부른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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