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개항 이후 서구화의 통로였다. 갖가지 '선진 문물'이 쏟아져 들어와 인천에 머물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인천은 어느 면에선 서울보다 오히려 '화려함'을 자랑했다고 한다. 경인철도·만국공원·주안염전 등 '인천이 최초·최고'란 명성은 그렇게 탄생했다. 인천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해 8도인들을 끌어들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이들에겐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여러 모로 참신한 매력이 풍기는 도시였다.

외래 문물 중에서도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기독교'를 빼놓을 수 없겠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인천을 통해 들어와 활동을 벌였다. 당연히 인천은 한국 개신교 관문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선교와 함께 서구식 교육과 의료 등 다양한 문물을 전파하면서, 우리 생활과 의식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인천의 경우 항구도시로서, 선교사들이 각종 자재와 물품 등을 확보하는 데 아주 좋은 장소였다. 우리나라에 개신교를 전파한 선교사들이 대부분 인천에서 활동을 시작해 전국으로 퍼져나간 이유다.

미국 북감리교회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북장로교회 언더우드 목사도 그랬다. 1885년 4월 인천항으로 입국해 국내에 첫발을 내디딘 이들이 처음 묵은 곳은 지금의 중구 중앙동 내 허름한 초가집. 여기서 아펜젤러 목사 부부는 서울로 올라가기 전 한 달간 머무르며 예배를 올렸다. 이 곳이 바로 남한 최초 교회인 '내리교회'의 모태다. 이후 감리교 선교사업 일환으로 인천지역 첫 사립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가 1903년 개교했다. 이처럼 서양식 교육과 더불어 교세를 꾸준히 확장하면서, 시내는 물론 멀리 강화 섬지역까지 감리교회가 잇따라 문을 열었다. 지금도 강화에 감리교회와 교인이 상대적으로 많은 까닭이다. 강화군엔 지역 최초의 감리교회인 '교산교회', 조선 전통과 서구 문화가 조화를 이뤄 한옥으로 지은 '성공회강화읍성당' 등 역사적인 기독교 유산들이 남아 있다.

이런 영향 때문일까. 강화군이 엊그제 강화대교 인근에 '기독교 근대 역사 기념관'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사업비 64억원을 투입하는 기념관은 연면적 1630㎡, 지상 2층 규모로 내년 12월 준공할 예정이다. 기념관엔 한국 기독교 초기 역사·문화·인물(이동휘·박두성·유봉진 등), 일제 치하 민족운동 등을 소개하는 전시관이 들어선다. 한국 근대사에서 강화군과 기독교(천주교 포함)의 관계는 밀접하다. 강화군에선 교인들을 중심으로 3·1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을 펼

치기도 했으며, 수많은 교인이 포교활동으로 순교를 당하기도 했다. 강화군은 이 기념관을 기독교인들이 찾는 성지순례 거점 관광지로 육성해 지역경제 활성화도 꾀하기로 했다. 아무쪼록 기념관이 강화군 근대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기독교를 재조명하고, 지역 대표 명소로 자리를 잡았으면 한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