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25.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왕회종(상)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25.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왕회종(상)
  • 인천일보
  • 승인 2020.07.05 18:07
  • 수정 2020.07.05 18:28
  • 2020.07.06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79년 경기도 마전군 군내면 아미리 출생
1905년 숭릉참봉·1907년 숭의전참봉 제수
적성·삭녕·안협 등서 의병 400~500명 모집
김진묵과 군자금·군수품 기부 요청 격문 내기도

일제, 1896년 안동읍 1000여 호 불 태운 이래
의병 근거지·마을 대상 무차별 '초토화 작전'
1907년 7월~이듬해 말 6681호 이상 피해 입어
퇴계 이황 사당·고택도 화마로부터 못 벗어나
의병 진압 지지부진하자 주민 학살·고문도 자행
일본군경 만행에 거족적 반일투쟁 불길 치솟아
▲ 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 매켄지(F. A. McKenzie)가 촬영한 1907년 가을 의병의 모습.
▲ 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 매켄지(F. A. McKenzie)가 촬영한 1907년 가을 의병의 모습.
▲ 왕회종 의병장 생가터. 경기도 마전군 군내면 아미리 284(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237번길 171). /사진제공=독립기념관
▲ 왕회종 의병장 생가터. 경기도 마전군 군내면 아미리 284(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237번길 171). /사진제공=독립기념관

망국의 위기 앞에 벼슬을 던지고 총을 들다

◆ 숭의전 참봉에서 의병장으로

왕회종(王會鍾, 1879~1925)은 경기도 마전군 군내면 아미리 284(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237번길 171)에서 아버지 왕재만과 어머니 우봉이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영종(榮鍾)이고, 자는 광일(光逸)이며, 호는 두암(斗菴)이다.

일찍이 학문을 익혀 18세부터 서당을 열었고, 27세인 1905년 4월 숭릉 참봉(崇陵參奉)에 이어 1907년 3월에는 숭의전 참봉(崇義殿參奉)으로 제수되었다. 숭릉은 조선의 현종과 왕비 명성왕후 김씨의 능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고,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를 비롯한 고려 국왕 7명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왕희종의 고향집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는 나라가 일제에 의해 망해 가는 시기에 한가하게 벼슬을 받고 생활을 한다는 것은 유학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벼슬을 받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다.

'한글-한자 혼용' 방식으로 표기된 당시 대한매일신보(1907. 09. 21.) '잡보'란에 실린 내용이다.

7월17일 경기도 이천읍에서 개성으로 피난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적성·삭녕·안협·토산 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는데, 그 인원이 4, 500명에 이르렀고, 7월15일 의병 100여 명이 이천군에 기습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천군수는 무기를 모아 언제든지 피난한다고 하며, 의병은 평강·신계 방면에서 출몰하면서 격문을 매우 빠르게 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기사에는 격문 내용을 간략히 요약했는데, 이를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저 일본은 임진왜란 이래로 한국인에게는 적이 되어 수십 년 동안 각지에서 침략을 횡행하니, 일본인과 함께 살면 한국 8도 인민은 멸망에 이를 것이므로 인민을 구제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하였으니, 돈과 곡식 등 물품을 능력에 따라 기부하라고 하였는데, 의병장은 왕회종과 김진묵(金秦默)이라.”

왕희종·김진묵 의병장이 경기도 북부지방 각지에서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사 전후에는 텅 빈 마을을 일본군이 방화한 내용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일본군이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벌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왕회종 의병장의 의병투쟁과 격문, 일본군의 민간인 집 방화 관련 기사 대한매일신보(1907. 09. 21.).
▲ 왕회종 의병장의 의병투쟁과 격문, 일본군의 민간인 집 방화 관련 기사 대한매일신보(1907. 09. 21.).

 

◆ 일제의 초토화 작전

전기의병 때인 1896년 4월2일(음력 2월20일) 경북의병의 본거지였던 안동읍 1000여 호를 불태운 적이 있던 일본군은 후기의병 때도 의병의 근거지로 판단되면 방화하는 것을 하나의 작전으로 삼았다. 특히 일제에 의해 광무황제가 퇴위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의병투쟁이 더욱 가열되었는데, 그 이후 일본군경은 의병 근거지는 물론, 의병에 협조한 마을은 모조리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였다.

필자가 <독립운동사> 제1권 525~527쪽에 나오는 자료를 정리, 편집한 것인데, 이 자료에 의하면, 강원·경기·경북·충북 지역은 집중적 피해를 입었고, 그중에서도 강원도 홍천읍은 300여 호, 경기도 양근군은 두 차례 755호가 불태워졌고, 경북 봉화읍과 순흥읍은 모조리 불태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일제통감부가 간행한 <제2차 한국시정연보>(1909)에는 1907년 7월부터 1908년 말까지 소실된 호수는 6681호라고 했는데, 비록 그 수치가 축소된 것일지라도 그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이 얼마나 심했던지 <매천야록>에는 퇴계 이황 선생의 사당과 고택마저 소각했다고 기술하였다,

“일본인들이 의병을 추적하여 예안군(禮安郡)을 들어간 후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사우(祠宇)와 고택(故宅)을 소각하였다.” (<매천야록> 제6권. 융희 원년 정미(속))

일본군은 의병진압이 성과가 오르지 않자 의병에게 밥과 짚신 등을 제공한 마을사람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보면, 경기도 이천 부근에서는 일본군이 마을에 들어와 불을 지르려 하자 노인은 '날 때부터 살아온 이 집을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죽을 장소로 남겨줄 것'을 애원하였으나 일본병은 서슴지 않고 노인을 사살했다.

▲ 왕회종이 숭의전 참봉 판임관 8등으로 임명된 황성신문 기사(1905. 04. 24.).
▲ 왕회종이 숭의전 참봉 판임관 8등으로 임명된 황성신문 기사(1905. 04. 24.).

◆ 거족적인 반일의병투쟁

1907년 당시 대한제국에서 '데일리 메일' 기자로 활동하였던 매켄지(F. A. McKenzie)는 귀국 후 <한국의 비극>이라는 단행본을 내었는데, 이 책에서는 초토화된 제천읍을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일본군은 제천을 불태움으로써 인근 부락에 본때를 보여 주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 도시를 불살랐다. 일본 군인들은 용의주도하게 불길을 조정하면서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모두 불살라 버렸다. 하나의 불상(佛像)과 군(郡)의 관아(官衙)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태워버렸다. 마을사람들이 도망갈 때 부상당한 다섯 사람의 남자와 부인 한 사람, 그리고 어린아이 하나를 남겨 놓고 갔는데, 이들은 모두 화염에 타 죽어 버렸다.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더운 초가을이었다. 제천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산등성이에는 일본기가 눈부신 햇빛으로 선명했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도 반사하여 번쩍이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거리로 나아가 잿더미 위를 걸었다. 일찍이 나는 이렇게 처참한 광경을 본적이 없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권. 466~467쪽)

어디 그뿐이랴! <독립운동사자료집> 속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하면, 강원도 고성에서는 일본군들이 의병을 찾아다니다가 주민들이 의병의 행방을 모른다고 하자 주민 7명을 학살하여 거리에 효수하였고, 또 의병을 수색하다가 잡지 못하자 주민 2명을 총살하여 시체를 솥에 넣고 끓여 많은 사람에게 그 골육을 맛보라고 강요하기도 하였다.

강원도 원주에서는 의병 혐의자 몇 명을 붙잡아 나무에 묶어 놓고 할복박피(割腹剝皮:배를 가르고, 살갗을 벗김)한 후 그것을 보고 손뼉을 치면서 웃는가 하면, 또 다른 지방에서는 의병을 쫓다가 잡지 못하자 양민을 잡아 땅에 눕힌 후 입으로 물을 부어 넣어 배를 북과 같이 팽창하게 한 후 그 위에 판자를 걸쳐 놓고 일본병 몇 명이 그 위를 눌러 물이 입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웃기도 하였고, 다른 한 지방에서는 의병을 잡지 못하자 주민 수백 명을 모아 벽지에 구덩이를 파고 반신이 나오도록 세운 후 마치 풀을 베듯 목을 베고 서로 박장대소하기도 하였다.

황해도 평산군에서는 겨울에 남녀 수백 명을 붙잡아 옷을 벗긴 후 종일토록 빙판 위에 세워 얼어 죽게 하였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같은 일본군경의 만행으로 배달겨레는 시골의 농민들까지도 일제가 악랄한 침략자라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나마 일제 앞잡이 정부에 협력해 오던 이·동장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반일의병투쟁 대열에 나서게 되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인천일보, INCHEONILBO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