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검 일인자' 백동수가 직접 시연한 무예서

 

▲ SBS 월화드라마 ‘무사 백동수’ 스틸컷.

“아버지!”를 부를 수 없는 자. 그래 어머니만 부를 수 있어 '한 다리가 짧다'하였다. 서얼(庶孼)! 중세 조선은 서얼을 반사(半士)라 불렀다. '반쪽 선비'라 얕잡아 부르는 말이다. 산초의 맛처럼 입안이 얼얼하여 사림(士林)과 대비되는 초림(椒林)이라고도 '서(庶)'자에 점이 넷 있어 '넉점박이'라고도 비하했으며(홍명희, 적서(嫡庶), 조선일보 1936.2.21.), 이인직(李人稙)은 <혈의누>에서 '일명(逸名)'이라 하였다. 아예 '이름조차 잃어버린 사람'이다.

바로 백동수가 야뇌, 즉 '세상을 벗어나 거친 들판을 걷는 사내'라 스스로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 사람은 얼굴이 순고하고 소박하며 의복이 시속을 따르지 아니하니 야인(野人)이로구나. 언어가 질박하고 성실하며 행동거지가 시속을 따르지 아니하니 뇌인( 人)이로구나.”

백동수의 매형이자 같은 서얼인 이덕무(李德懋)가 <청장관전서> 제3권/ 영처문고 1(_處文稿一)-기(記)에 써놓은 '야뇌' 풀이이다. 야뇌는 백동수가 스스로에게 붙인 자호(自號)이다. 이 호에서 조선후기 거친 들판을 외롭게 걸어가는 백동수의 모습을 본다. 이덕무는 이 글에서 “대저 사람이 시속에서 벗어나 군중에 섞이지 않는 선비를 보면 반드시 조롱한다.”라 하였다.

백동수는 조선 후기의 서얼 무신이다. 본관은 수원이고 휘는 동수(東脩), 자는 영숙(永叔), 호는 야뇌(野 )·점재(漸齋)·인재(靭齋)·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강개한 죽음을 맞은 평안도병마절도사 증 호조판서 충장공 백시구(白時耉, 1649-1722)의 증손이며, 백상화(白尙華)의 손자다.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부호군(行龍_衛副護軍) 백사굉(白師宏)이다. 우리가 잘 아는 간서치 이덕무(李德懋)가 매형이다. 조부인 백상화가 증조부 백시구의 서자였기에 신분상 서얼이다.

29세인 1771년(영조 47)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한계와 숙종 대 이후부터 지독하게 퍼진 만과(萬科)로 인해 관직 수가 턱없이 부족해 벼슬을 얻지 못하였다.

30세인 1773년 가난을 이유로 식솔들과 함께 미련 없이 한성을 떠나 강원도 기린협으로 들어가 직접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33세인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가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조직하면서 서얼 무사들을 등용할 때 창검의 일인자로 추천받았다.

46세인 1789년(정조 13) 분수문장(分守門將)에 제수되고, 장용영 초관(哨官)을 지내고, 같은 해 4월, 새로운 무예서를 편찬하라는 정조의 명에 따라 검서관(檢書官)이었던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 편찬에 참여하였다.

47세인 1790년(정조 14) <무예도보통지>를 완성한다. 이후 선생은 충청도 비인현감(庇仁縣監), 평안도 박천군수(博川郡守)를 지냈고 63세인 1806년(순조 6) 경상도 단성현(慶尙道 丹城縣)에 정배(定配)되었다.

1816년 향년 74세로 서얼로서의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책을 몇 권 써 본 이들은 안다. 책은 결코 지은이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이 글만 하여도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에서 활용한 자료의 원전을 쓴 수많은 저자들과 번역자들, 또 글이 세상 빛을 쬐게 만들어 준 출판인들, 여기에 종이와 문방제구 등까지 생각하면 저자는 나 하나가 아닌 셈이다. 분명히 말하면 선생이 <무예도보통지>를 쓴 것이 아니라 이덕무와 박제가가 함께 썼고 그림은 이름 모를 화공이 그렸다. 그런데도 이 이를 굳이 끌어온 이유는 선생의 시연(試演)이 없었다면 결코 <무예도보통지>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무예도보통지>는 무예서이다. 이덕무도 박제가도 이름 모를 화공도 무인이 아니다. 오로지 선생만이 무예에 정통하여 이를 시연할 수 있었다. 당연히 <무예도보통지>의 출간에 으뜸 역할을 한 인물은 백동수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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