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살에 산화…삼대가 항일투쟁에 목숨 바쳐

 

 

 

 

 

▲ 정용대 의병장의 묘와 묘비(경기 양주시 남면 경신리 산 72)
▲ 정용대 의병장의 묘와 묘비(경기 양주시 남면 경신리 산 72)

 

 

1908년 겨울 들어 창의원수부 맹활약

소부대 단위 유격전 펼치며 보급 주력

이듬해 2월까지 일본군과 교전서 전공

 

잇단 전투로 탄약 부족·병력 손실 가중

3월16일 격전 중 우군장 윤인순 전사

31일엔 이은찬 의병장도 용산서 피체

창의군사부와 연합…돌격장으로 활약

임진강 일대서 전과 올리고 의진 수습

 

병력 통솔해 투쟁 이어갔으나 역부족

의진 해산 후 고향 은신 중 9월9일 피체

1910년 1월26일 경성감옥서 사형 당해

 

▲ 윤인순 의병장의 전사, 이은찬 의병장의 피체 소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투쟁을 전개했다는 정용대 의병장의 기록 <폭도에 관한 편책>(1909. 05. 15.).
▲ 윤인순 의병장의 전사, 이은찬 의병장의 피체 소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투쟁을 전개했다는 정용대 의병장의 기록 <폭도에 관한 편책>(1909. 05. 15.).

 

 

 

 

창의원수부 의진의 활약상

1908년 겨울로 접어들자 창의원수부 의진은 포천지역의 일본군 수비대·헌병대·경찰대를 섬멸하기 위해 유인책을 쓸 정도로 능동적인 활약을 벌였다. 이에 일본군은 용산수비대와 경성헌병대의 병력을 급파하고, 포천지역에 경비전화를 가설하는 등 창의원수부 의진의 습격에 신속히 대처하도록 하였다.

창의원수부 의진은 분산하여 소부대 단위의 유격전을 펼치는 가운데 포천, 영평 일대에서 의복, 식량, 무기 등과 군자금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때에도 이은찬 의병장은 반드시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후일 갚도록 함으로써 지방민들도 그를 '대장(大將)' 또는 '각하(閣下)'라고 일컬었다.

이듬해인 1909년 1월4일 창의원수부 의진 200여 명은 포천지역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포천헌병분견소와 수비대를 기습하고 양주로 이동하였다. 1월7일에도 양주헌병분견소를 기습하면서 의진을 나눠 동두천헌병분견소를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1월15일 밤 300여명 의진으로 포천군 내촌면과 가산면을 기습하고 양주로 나아갔고, 1월25일에는 170여명의 의진으로 양주군 광적면에서 일본군 정찰대 및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그리고 1월26일, 28일에도 의진을 두 부대로 나누어 일본 헌병대와 경찰대를 공격한 후 소를 8마리를 잡아 설을 쇤 것이 <통감부문서> 10권 '헌기 제210호'(1909. 01. 31.)에 나타나 있는데, 일제의 기밀문세에는 이때 창의원수부 의진이 800명 규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폭도수령(의병장-필자 주) 이은찬 동 정용대

위의 자들은 음력 12월30일 포천군 광릉면에서부터 양주, 고주내면 삼가대에 와서 윤인순과 합치고 소 8마리를 빼앗아 도살하여 정월을 보내고, 4일간 체재하고 파주군을 향해 출발하였음. 그리고 인원수는 800명 정도라고 함.“

 

이처럼 창의원수부 의진은 1908년 12월부터 약 3개월간 포천, 가평, 양주 등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줄기찬 의병투쟁을 벌여 큰 성과를 거뒀으나 1909년 2월 상순에 이르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연일 계속된 전투로 탄약이 결핍되고, 사상자가 속출하여 전투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했던 일본군은 군경 합동부대와 변장대를 편성하여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다. 창의원수부 의진은 포천과 양주 등지로 옮겨 다니면서 총탄을 아끼는 이른바 '전투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힘썼으나 3월6일 양주군 현암리에서 이들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했고, 이어 3월16일(17일) 양주 북방에서 우군장 윤인순 의병장이 일본군 삭령수비대와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자 이은찬 의병장은 의진을 해산하고, 훗날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3월31일 밀정의 간계에 의해 용산 정차장에서 피체되고 말았다.

 

▲ 정용대 의병장이 1909년 9월9일 피체되었다는 기록 <폭도에 관한 편책>(1909. 09. 13.).
▲ 정용대 의병장이 1909년 9월9일 피체되었다는 기록 <폭도에 관한 편책>(1909. 09. 13.).

 

창의군사부 돌격장, 창의원수부 대장으로

창의원수부 우군장 윤인순 의병장이 전사하고, 중군(대장) 이은찬 의병장이 직할부대를 해산하는 상황 속에서도 정용대 의진은 의병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1909) 3월27일 오후 1시경, 경기도 통진군 주재 일한 순사 5명은 그곳 헌병과 같이 동군 양릉면 삭제리에서 폭도수괴(의병장-필자 주) 정용대 및 그 부하 27명과 충돌하여 약 2시간여 교전 후 폭도들을 흩어지게 하고, 이튿날 오전 3시까지 추적하였던바, 폭도들은 모두 정예한 총기를 휴대하고 김포 쪽으로 퇴각하여 동군 운양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교하군을 향하여 도주하였다. 이 교전에서 피아(彼我) 사상자가 없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533쪽)

 

정용대 의진은 인근 의진과 연합해서 의병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창의군사부를 이끌고 있던 권중설 의병장과 함께 각국 영사에게 통고문을 보낸 것이 <통감부문서> 10권 '헌기 제1088호'(1909. 05. 25.)에 기록돼 있는데, 이 문서에는 그가 창의군사부 돌격장으로 나타나 있다.

그 후 정 의병장은 임진강 유역 각지에서 일본군경과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린 후 창의원수부 의진을 수습하여 대장에 오르고, 국권회복의 의지를 다졌다.

 

“폭도수괴 정용대는 최근 풍덕군 방면으로부터 돌아와서 양언(揚言)하기를, “이은찬·윤인순 두 의병장을 잃었으나, 우리 의병은 좌절한 것은 아니다. 방가(邦家:국가-필자 주)를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여 왜놈의 압박을 제거하고 국권회복(國權恢復)을 도모하여 그 뜻을 관철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권. 272쪽)

 

“올해 3월, 윤(尹:윤인순-필자 주)은 수비대로 인하여 죽고, 이(李:이은찬-필자 주) 또한 생포되었으므로 정(鄭:정용대-필자 주)은 원수가 되어 부하를 통솔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조부 이래 배일주의를 품고 있었고, 그 조부와 부는 동학당의 상반(上班)으로서 행동 중, 조부는 27, 8년(실제로는 15년-필자 주) 전, 일청전쟁 시 일본군에게 살해당하고, 부 또한 행동 중, 병사하였음. 이들의 관계상 그는 현 한국의 상태를 분개하고 이 기회에 부조(父祖)의 뜻을 이어받아 자가(自家)의 명예를 발휘하고, 한편으로는 국권회복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9권. 650쪽)

 

 

▲ 정용대 의병장에 대하여 일제통감부 통감이 경성공소원 검사장에게 사형집행을 명령하고, 이를 이완용에게 통보한 <통감부래안>(1910. 01. 22.).
▲ 정용대 의병장에 대하여 일제통감부 통감이 경성공소원 검사장에게 사형집행을 명령하고, 이를 이완용에게 통보한 <통감부래안>(1910. 01. 22.).

 

피체, 경성감옥에서 순국하다

1909년 여름이 되자 일본군경의 의병 학살전은 극심해져 의병투쟁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특히 이은찬 의병장의 피체 이후 의병들의 사기가 떨어져서 의진을 구성하는 의병수도 점차 줄어들게 되고, 소지했던 탄환도 바닥이 난 상태가 되자 정용대 의병장은 의진을 해산하고 고향 인근으로 은신했다가 1909년 9월9일 마침내 피체되기에 이르렀다.

 

“폭도수괴 정용대는 본월 9일 오전 10시, 적성군 남면 덕도리에서 적성헌병대의 손에 체포되었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1. 정용대는 부하 2명을 인솔하고 이달 9일 오전 10시, 향리 적성군 남면 덕도리 한 주막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는 중임을 적성헌병분견소 밀정이 탐지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누구냐고 물으니, 그는 이름을 허위로 말하고 달아나므로 그 밀정은 '정용대'라고 가리키는 자를 밭 가운데서 체포하였던 바, 과연 동인이었다.

2. 정용대는 상투를 하고 갓을 썼는데, 엷은 차 색깔의 비단으로 된 한복을 입고, 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았다. 체포 후 그는 자못 결심한 듯,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5권. 393쪽)

 

정용대 의병장은 피체된 후 10월2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형이 선고되자 공소, 12월1일 경성공소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고, 이듬해인 1910년 1월10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교형이 확정되었다. 1월22일 일제통감부 통감은 경성공소원 검사장에게 사형집행을 명령하였다는 것을 대한의 내각총리 이완용에게 통지하였다.

 

“기밀 통발(統發) 제125호

경기도 적성군 남면 경신동(庚申洞)

농업

내란범

정용대(鄭用大). 29세

우(右) 자는 융희 2년 2월 이래로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의 부하를 모집하여 이를 지휘하여 경기도 적성·양주·풍덕·교하·통진 등 각 군을 횡행하고 수차례 헌병대·경찰대와 교전하고, 동 3년 6월경까지 오로지 관헌에게 항적(抗敵)하여 내란죄를 범한 소위에 대하여 형법대전 제195조에 의하여 명치 42년 12월1일 경성공소원에서 피고를 교(絞)에 처하는 판결(공소기각)을 하고, 피고는 이에 대하여 상고를 신립한 바, 본년 1월10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판결을 이에 확정함으로써 본일 경성공소원 검사장 세코 스케지로(世古祐次郞)에게 판결대로 집행할 사(事)를 명(命)하였기 통지(通知)함.

명치 43년 1월22일

통감 자작 소네 아라스케(曾 荒助)

태자소사(太子少師)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각하” (이태룡 역주, <통감부래안(統監府來案)>. 32쪽)

 

경술국치 이전인데도 불구하고, 통감부 통감의 사형 집행을 명령한 지 나흘 뒤인 1월26일(음력 12월16일) 정용대 의병장은 경성감옥(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 전신)에서 순국하니, 향년 29세였고,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