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상 연구기준이 된
신륵사 삼존상부터
소헌왕후 죽자 세종이 세운
조선왕릉 최초 합장무덤까지
남한강 줄기따라 볼거리
/자료_사진출처=문화재청

 

“내가 꿈꾸는 태평성대란 백성이 하려고 하는 일을 원만하게 하는 세상이다.”

세종은 '백성'이 중심인 세상을 꿈꿨다. 세종이 잠든 경기도 여주. 남한강 줄기를 따라 세종의 정취가 묻어나는 곳, 여주가 품어온 보물을 소개한다.

 

 

 

위치 : 경기도 동남부에 있는 시

면적 : 608.37 ㎢

인구 : 11만1234명(2020년 5월 기준)

행정구역 : 상동, 홍문동, 창동, 우만동, 단현동, 신진동, 하동, 교동, 월송동, 가업동, 연라동, 상거동, 하거동, 삼교동, 점봉동, 능현동, 멱곡동, 연양동, 매룡동, 천송동, 오학동, 현암동, 오금동, 가남읍, 점동면, 흥천면, 금사면, 능서면, 대신면, 북내면, 강천면, 산북면, 여흥동, 중앙동

시 화 : 개나리

시 목 : 은행나무

시 조 : 백로

주요 명소 : 신륵사, 세종대왕릉, 목아박물관, 황학산수목원, 이포보

 

경기도 동남부에 위치한 여주시는 동쪽으로는 원주시, 서쪽으로는 이천시, 북쪽으로는 양평군, 남쪽으로는 충주시와 접하고 있다. 2013년 9월23일 여주군에서 여주시로 승격됐다. 남한강을 끼고 있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으며 대개는 농경지이다. 2013년엔 도농복합시로 승격됐다. 특산물은 인접지역인 이천과 같은 쌀과 도자기이다.

 

 

#조각 예술의 집합체 '여주 고달사지 승탑'

[국보 제4호]

소재지: 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

지정일: 1962년 12월20일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높이 4.3m의 고려시대의 승탑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있다.

반면, 지붕돌 윗면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귀꽃이 달려 있는데, 일부는 파손된 상태이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대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중대는 이 승탑에서 가장 조각 수법이 뛰어난 부분으로 거의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용과 같은 얼굴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돼 사실감이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승탑의 기본형인 팔각원당형 구조를 잘 따르면서도 조각의 세부 수법에서는 고려 특유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여주 파사성'

[사적 제251호]

소재지: 경기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산8-10번지

지정일: 1977년 7월21일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약 1800m이며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신라 파사왕때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승려 의암이 승군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남한산성에 대한 비중이 증가해 파사성에 대한 중요성이 감소했다. 현재는 동문이 있던 자리와 남문이 있던 터가 남아있다.

이 성은 성의 일부가 한강변에 나와있어 강 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매우 좋은 요새이다.

 

#구운 벽돌이 만든 정취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제226호]

소재지: 경기 여주시 신륵사길 73 (천송동, 신륵사)

(지번)경기 여주시 천송동 산113-1

지정일: 1963년 1월21일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 '세종대왕릉' '효종대왕릉'

[사적 제195호]

소재지: 경기 여주시 영릉로 269-10 (능서면) 여주 영릉과 영릉

지정일: 1970년 5월27일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이다.

세종은 정치·경제·사회·역사·문화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다.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헌릉 서쪽 산줄기에 쌍실 무덤인 영릉을 만들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무덤으로 문종 즉위년(1450)에 왕이 죽자 합장했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서로 다른 방을 갖추고 있는 합장무덤을 하고 있다.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무덤배치의 기본이 됐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덤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겼다.

무덤의 주변에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석물인 상석, 명등석, 망주석, 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며, 훈민문·세종대왕동상·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 것이다.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의 무덤인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 문자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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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