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
이 모든 전장의 중심은 경기도

12만8740명 민간인 죽거나 다쳐
파괴·훼손 건물 2071만1469채
자산 피해액 4억여원 달해

'수원화성' 포탄 등으로 파괴
어린 정치사상범 어딘가서 처형

사직리 전투·죽미령 전투지 등
70년 흘렀지만 흔적은 곳곳에

 

 

▲ 1950년 7월1일 이감을 위해 수원역 앞에서 대기 중인 정치사상범들(영상 갈무리). /자료제공=수원시

6·25전쟁은 '톱질전쟁'이라 하듯이 전쟁 발발 후 1년 사이에 공산군과 유엔군은 네 차례나 38선을 넘나들며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다. 이 모든 전장의 중심은 경기도였다.

3년 간 치러진 전쟁으로 도는 무려 12만8740명의 민간인이 죽거나 다치는 피해를 보았다. 파괴·훼손된 건물이 2071만1469채, 자산피해액은 4억여원에 달했다. 곳곳이 남침에 맞선 전투, 적의 총포탄이 쏟아진 곳, 끝까지 고지를 사수하려는 저항, 민간인 희생 등으로 가득했다. 70년이 흘렀지만, 이 수많은 현장은 우리 주변에 아직 남아 당시의 비극을 알린다.

#수원

수원은 6·25전쟁 요충지였다. 권선구 서둔동 옛 농촌진흥청 부지는 전쟁이 일어난 후 한강방어선 작전을 펼친 육군본부와 함께 미 극동사령부 전방지휘소가 있었다.

수원비행장은 개전 초기 전선시찰을 위해 극동사령관 맥아더가 처음으로 한국당을 밟은 곳이자, 1951년부터 전투기들의 출격기지로 사용됐다.

전쟁으로 인해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이 포탄 등으로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시가 공개한 기록영상에서 춘천형무소와 인천소년형무소에서 후방의 대전형무소로 이감 대기 중이던 어린 정치사상범들이 수원역 앞에 억류된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이감 중 어딘가에서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마지막 모습이다.

 

#오산

'죽미령 전투지'가 있기로 유명한 오산은 갈곶동과 외삼미동에 사적이 남아있다. 죽미령 전투는 1950년 7월 4일 미군이 전쟁에 참여해 처음으로 북한군과 전투를 치른 역사다.

오산 북방 약 5Km 지점에 위치한 조그마한 횡격실 능선으로 중앙에 주봉인 반월봉(117m)과 서쪽에 무명고지(90m), 그리고 동쪽에 92고지 등 3개의 고지군이 있었다. 12시간 동안 진지를 지킨 스미스부대원들은 결국 죽미령에서 철수했는데, 부대가 안성을 거쳐 천안에 집결했을 때 전사·부상·실종자를 합해 인명피해가 150여명에 달했다.

▲ 1951년 1월28일 수원을 재탈환한 뒤 미군탱크가 수원화성 장안문을 통과하고 있는 모습 (영상 갈무리)./자료제공=수원시
▲ 1951년 1월28일 수원을 재탈환한 뒤 미군탱크가 수원화성 장안문을 통과하고 있는 모습 (영상 갈무리)./자료제공=수원시

 

#평택·안성

평택과 안성 지역은 한·미연합전선 상의 서부지역으로, 서쪽으로는 아산만과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산악지대로 연결돼 '서부전선 방어'의 주요 길목이었다. 평택 신장동 및 서탄면 장동리·적봉리·금각리 일대는 해병비행전대 및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전투비행대대의 작전기지였다.

평택동에서는 1950년 7월 3일 호주 공군기 오폭으로 전방에 공급될 보급품이 폭파되고, 역 건물까지 파괴되는 일이 있었다.

 

#이천·여주

중공군이 여주-이천 선에서 한강 남쪽 주 저항선을 편성한 장소로, 이천 진리동 일대에서 국군 제6사단 19연대 1대대가 1950년 7월 2~3일 북한군 제2사단 6연대와 전투를 벌였다. 여주 단현리에는 1951년 2월 24일 미 제9군단장 무어 소장이 전선시찰 중 헬리콥터 추락으로 전사한 장소가 있다.

 

#광주

광주 곤지암리 일대는 국군 제6사단 19연대 3대대 10중대가 1950년 7월2일 중대 규모의 북한군 보급부대를 공격해 전멸시킨 '194고지 전투지'가 있다.

이천지역으로 급파된 제19연대 중 3대대가 곤지암리 남쪽 194고지에 배치됐다. 194고지 진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3대대 10중대는 고지 아래의 곤지암사거리에서 북한군의 대열을 목격했고, 제10 중대장 김두일 대위는 2개 소대로 이들을 포위한 후 예상 도주로에 병력을 중점적으로 배치했다.

이후 중대장의 사격개시 명령과 함께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진 가운데 북한군을 전멸시켰다. 194고지 전투에서 국군의 성과는 빛났다. 피해 없이 100여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5명의 포로를 포획했으며 또한 우(牛).마(馬)와 포탄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양평·가평

가평에는 1951년 4월 23일 중공군의 춘계공세시 호주군 제3대대가 영국연방 제27여단에 배속돼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한 목동리 '목동전투지', 1951년 4월23일 중공군 춘계공세시 연방 제27여단에 배속된 캐나다 대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한 이곡리 '죽둔리 전투지' 등이 있다.

양평 지평리 일대는 서쪽으로 뻗은 경강국도(서울-양평-횡성), 북동쪽으로 뻗은 24번 도로(여주-지평리-홍천)와 남서쪽으로 연결되는 24A 도로(여주-곡수리-지평리)가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1951년 2월11일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양평·가평은 민간인 피살이 많던 장소이기도 했다. 가평경찰서에서 작성한 '피살자명부'에는 국군과 민간인들이 1950년 9월 북한군 보안대에 체포돼 가평면 마장리 노루목고개에서 학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8개 구덩이에 나뉘어 각각 40~50명씩 매장된 사건이다.

양평의 경우도 1952년 양평경찰서에서 작성한 '피살자명부'가 존재하는데, 양평 부근의 공무원, 군경, 민간인(양평 사람 338명, 피난민 400여 명) 등이 1950년 9월 퇴각하는 북한군에 의해 피살됐다는 내용이 있다.

가평 도대리는 제32연대장인 권동찬 중령이 적군에게 포위된 부대원들과 철수 작전을 펼쳐 일부 병력을 살렸지만, 자신은 적과 끝까지 대항하다 자결한 역사도 있다.

 

#동두천·포천

동두천은 1950년 6월 25일 국군 제1연대가 북에서 내려오는 북한군 제4사단과 싸운 '소요산 전투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혼성대대가 1951년 3월 6일 미 제3사단과 반격작전을 수행한 '마차산 전투지' 등이 있다. 상봉암동·하봉암동 일대다.

포천은 무려 11곳의 장소가 있는데, 노곡리 일대는 주민들이 북한 지역이나 적진에 침투하기 위해 구성한 '독수리유격대'가 만들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1950년 6월 25일 국군 제9연대 2대대가 남진하려는 북한군 제3사단 예하부대의 남침을 받고 전투한 사직리 '사직리 전투' 등이 남침 당일의 역사를 가진 곳이 다양하다.

기지리에는 국군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당일 북한군의 탱크공격을 방어했던 콘크리트 진지가 남아있다.

3월24일 의정부→동두천, 의정부→포천 도로를 따라 진출하려는 미 제3사단은 제15연대와 미 제64전차대대, 제65연대의 전차소대로 편성된 호킨스 특수임무부대와 중공군 간 대치가 있었다.

 

#파주

파주 마정리에는 도라산리 '도라산 전투지', 설마리 '설마리 전투지' 등 전투의 장소를 비롯해 '휴전협정'에 따라 풀려난 국군과 유엔군 포로들이 귀환하기 위해 건넌 '자유의 다리'가 있다.

자유의 다리는 당초 경의선 철교였다. 6·25 때 파괴되었던 것을 휴전이 성립되고 1953년 급히 세워졌다.

당시 이 다리를 거쳐 1만2773명의 국군포로가 북측의 집요한 설득을 뿌리치고 자유를 택했다.

해병 제1연대장인 김석범 대령이 1952년 9월5일부터 20일까지 서부전선 장단면 사천강 부근의 전진진지인 일명 '혼비고지'에서 전투를 전개해 임진강으로 진출하려는 중공군의 기습을 수차례 막아낸 기록이 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6·25전쟁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사적지는 경기도내(인천광역시 제외) 67곳으로 추정된다.
 

/김현우 기자 kimhw@incheonilbo.com

◆자료문헌/ 경기문화재단이 펴낸 '경기도의 6·25전쟁'에서 발췌, 재구성하였습니다.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

"도내 100곳서 6만명 민간인 희생…곳곳서 학살 자행"

-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대화 중요

▲ “6·25 전쟁의 아픔을 깊이 반성하고 교훈 삼아 평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신기철(사진) 인권평화연구소장은 24일 전쟁이 낳은 끔찍한 결과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에 평화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신 소장은 인천일보와 인터뷰에서 단지 '안 싸우는 게 좋은 거다'는 관점으로 평화를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민간인 학살과 국군 피해, 피난민 등 참혹한 전장을 설명하며 중요성을 수차례 강조했다. 신 소장은 “전쟁 첫해 국군 8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휴전 논의를 시작한 2년간 20만명이 숨졌다”며 “특히 휴전 논의 중 숨진 대다수가 후방에서 올라온 피난민과 청년이었다. 전쟁만 없었다면 모두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다고 국가는 전쟁 피해자들을 책임지고 보살피지 않았다”며 “많은 참전용사가 비참하게 살았다.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전쟁이 가장 무서운 이유로 '민간인 학살'을 꼽았다. 전쟁 당시 도내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학계에서는 도내 100여 곳에서 6만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 소장은 “전쟁 발발 6개월 사이 민간인 100만명이 죽었다. 총을 들고 싸우다가 전투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며 “전쟁과 아무런 상관없는 시민들이었으나 이념이 다르다, 적국에 도움이 된다는 등 이유로 국가가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념대립'으로 전쟁이 발발한 게 아니라며 근본적인 원인을 대화단절에서 찾았다. 신 소장은 “6·25전쟁 전 남한과 북한이 대화를 단절하고 적대시했다”며 “양국이 '무력'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이어 “지금도 남북관계가 악화하자 우리도 강하게 나가야 한다든지,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이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신 소장은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대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모든 문제를 대화보단 힘 대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다”며 “서로 사이가 좋든 나쁘든 어떤 상황이라도 '대화 통로'를 만들어 전쟁을 피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경훈 기자 littli18@incheonilbo.com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

“6·25 전쟁의 아픔을 깊이 반성하고 교훈 삼아 평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신기철(사진) 인권평화연구소장은 24일 전쟁이 낳은 끔찍한 결과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에 평화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신 소장은 인천일보와 인터뷰에서 단지 '안 싸우는 게 좋은 거다'는 관점으로 평화를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민간인 학살과 국군 피해, 피난민 등 참혹한 전장을 설명하며 중요성을 수차례 강조했다.

신 소장은 “전쟁 첫해 국군 8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휴전 논의를 시작한 2년간 20만명이 숨졌다”며 “특히 휴전 논의 중 숨진 대다수가 후방에서 올라온 피난민과 청년이었다. 전쟁만 없었다면 모두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다고 국가는 전쟁 피해자들을 책임지고 보살피지 않았다”며 “많은 참전용사가 비참하게 살았다.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전쟁이 가장 무서운 이유로 '민간인 학살'을 꼽았다. 전쟁 당시 도내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학계에서는 도내 100여 곳에서 6만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 소장은 “전쟁 발발 6개월 사이 민간인 100만명이 죽었다. 총을 들고 싸우다가 전투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며 “전쟁과 아무런 상관없는 시민들이었으나 이념이 다르다, 적국에 도움이 된다는 등 이유로 국가가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념대립'으로 전쟁이 발발한 게 아니라며 근본적인 원인을 대화단절에서 찾았다.

신 소장은 “6·25전쟁 전 남한과 북한이 대화를 단절하고 적대시했다”며 “양국이 '무력'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이어 “지금도 남북관계가 악화하자 우리도 강하게 나가야 한다든지,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이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신 소장은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대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모든 문제를 대화보단 힘 대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다”며 “서로 사이가 좋든 나쁘든 어떤 상황이라도 '대화 통로'를 만들어 전쟁을 피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경훈 기자 littli18@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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