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 못 간 소시민들 고통 드러나
23살로 갓 태어난 아들을 둔 여경 이춘성은 인민군에 체포돼 풀려나기까지 상상할 수 없는 공포를 경험했을 거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는 혐의로 붙잡힌 24살 여경 이흥록, 그녀를 취조한 '인천시 정치보위부'는 이흥록을 “악질적 여순경”이라고 매도했다.
6·25전쟁 발발 후 십여일 만에 인민군에 함락된 '인천'을 탈출하지 못한 시민이 겪었을 고충 일부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인천일보>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 자료는 1950년 8월1일 '인천시 정치보위부'가 붙잡았거나 자수한 인천지역 '경찰'에 대한 즉결처분 내용으로, 국립중앙도서관이 미국국립문서기록청에서 입수했지만 그 후 여타 자료들과 함께 기억 속으로 묻혔다. 그동안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잠들어 있던 이 사료가 6·25 70주년을 맞아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사료를 확인한 조우성 인천일보 주필은 “6·25전쟁 이면에는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인천에 남은 소시민들의 고통이 엄청났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동안 자료가 없어 연구에 한계를 보였던 만큼 이 자료를 통해 일부나마 인천 시민이 겪은 전쟁의 상처를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인천을 점령한 북한은 당시 사상검증 등으로 악명을 떨친 정치보위부(보위부)를 통해 인천 등지에서 활동한 경찰 36명을 붙잡아 성향을 분석했다. 보위부 판단에 따라 이들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다. 이에 이들 36명은 경찰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에 따른 후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찬양 등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자술서'와 '서약서', '고백서' 등 다양한 방식으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한 36명의 인천 경찰.
특히 이 중에는 그동안 정보가 부족했던 인천여자경찰이 다수 포함돼 당시 여자경찰관이 되기까지 받은 훈련과 활동 내용 등을 보여주고 있다. 여경 자술서를 통해 여경 훈련시설이 당시 경기도 개성에 위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불과 15일간의 훈련으로 여자경찰이 됐다는 대목도 나온다. 또 여자경찰 임무 중 하나인 '풍기단속' 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 경찰이란 겉모습 이면에 '팔에김(八金)'이란 암호명으로 경찰에서 당 정치보위부가 파견한 '8인조단'으로 간첩 활동을 했던 자도 만날 수 있다. 그는 38지구 해주 정치보위부장과 파견 8인조단 책임자로부터 일원임을 확인받고 석방됐다.
이들 36명의 경찰은 생사여탈권을 쥔 인천시 정치보위부장에 의해 '석방(구류)'으로 결정돼 목숨을 건졌다.
/이주영·이순민·김은희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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