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최북단 백령도엔 봄도 한달여나 늦다. 2010년 3월, 천안함 피폭사태 때는 한층 춥고 바다도 사나웠다. 바닷속 함체 인양작업은 더뎌지고, 외딴섬에 내던져진 기자들은 하릴없이 해변을 서성였다. 어느날 연화리 앞 갯바위로 나갔다가 쇠꼬챙이 달린 호미로 굴을 캐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한 입 맛보라”며 건네주는 손톱 크기의 낯선 굴이 그렇게 맛있었다. '석화' 또는 '알굴'이라 했다. 근처 모래밭에는 꽁꽁 언 손을 녹여줄 화톳불이 피워져 있었다. “이 굴 캐서 애들 공부 다 시켰다”던 해변의 여인네들이었다.

▶배 고프던 시절, 3면이 바다인 나라의 해안가는 우리네 억척 어머니들의 치열한 일터였다. 어릴 적 고향 어촌 마을에는 '제주댁'으로 불리는 집들이 더러 있었다. 제주도 해녀들이 뭍으로 원정 물질을 나왔다가 육지 남자와 결혼해 눌러앉은 집이다. 제주해녀 역사는 고려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에는 완도군의 청산도로 첫 원정 물질을 나왔다. 이 후 전국의 해안은 물론, 나가사키_칭타오_블라디보스톡까지 진출했다. 여름 한 철, 동해안 해녀들은 주로 성게잡이에 매달렸다. 해안가에는 여기 저기 포장을 치고 성게들을 까는 '성게막'이 설치된다. 자식들 배곯리지 않으려는 여인네들이 모두 달려들어 성게를 깠다. 그러나 정작 성게는 한 톨 맛도 못 본 채, '은단(銀丹)'이라며 값을 높이 쳐주는 일본으로 전량 수출하던 시절이었다.

▶서_남해안 해변의 여인네들은 굴을 캐고 까는 일로 아이들을 먹여 키웠다. 추운 계절에만 일이 있으니 바닷 바람을 가려줄 움막이 있어야 했다. 판자나 비닐로 얼기설기 엮은 굴막이다. 경남 진해의 안골 굴막은 요즘 시설을 현대화 해 굴 먹방 순례지 반열에 올랐다. 굴 고장 경남 통열 일대에는 굴막 대신 기업형 굴 박신(剝身)공장들이 성업 중이다. 그 곳 지역신문들에는 '굴 껍데기 불법 처리'가 단골 기사다. 2003년 연평도에서 까치산 패총 유적이 발굴됐다. 신석기 시대의 수혈 주거지와 토기, 어망추 등도 나왔다. 5000∼6000년 전 그 때도, 자식들 위해 찬바람 맞으며 굴이며 조개들을 태산같이 까고 앉았을 아주 옛날 연평도 여인네들 모습이 어른거린다.

▶인천 동구 만석부두의 굴막 30여 채가 오늘 내일 철거된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갈 곳 없는 실향민들이 굴을 까며 생계를 이어오던 터전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한 때는 누구인가의 억척 어머니들이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땀 흘렸던 곳. '신성한 노동'이란 수식어가 부족하지 않을 옛 일터다. 이와 함께 이 땅 억척 해변의 여인들 시대도 가고 있는 것인가.

 

 

정기환 논설실장